역사학도가 받아적은 외할아버지 이야기
허홍무가 구술한 생애 속에서 역사 회고
개인의 경험 역사와 연결… 기록의 이유
1935년생 허홍무는 충남 아산군(현 아산시) 영인면 신운리에서 태어났다. 대한제국이 일본에 병합된 지 25년이 지난 시점이자 1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에는 또 다시 전운이 감돌고 있는 시점이었다.
허홍무의 할아버지는 농촌의 지주였고, 그 밑에서 허홍무는 부유한 어린 시절을 보낸다. 그러나 집안의 광산 사업이 실패하면서 가세가 기울기 시작했고, 허홍무의 아버지는 일자리를 찾아 아산에서 인천 부평으로 식솔을 이끌었다. 해방을 맞고 다시 아산으로 돌아왔다. 곧 이어지는 전쟁의 소용돌이를 허홍무의 집안은 피하지 못한다. 허홍무는 한국전쟁 이후 군에 입대했다가 제대하고 가정을 꾸린다.
평범한 사람 허홍무가 태어나 겪은 일제강점기, 해방공간, 한국전쟁과 전후 시기를 요약하면 이렇다.
역사학도 이동해가 쓴 ‘단 한 사람의 한국 현대사’(2024·푸른역사)는 허홍무의 ‘구술’을 토대로 역사적 맥락을 찾아내고 검증해 ‘하나의 역사’로 재구성했다. 한 사람의 구술생애사이지만, 한국 현대사, 더 넓게는 2차 세계대전(태평양전쟁)과 한국전쟁이 연관된 세계사가 직조됐다. 저자의 꼼꼼한 구술 검증과 이를 뒷받침하는 자료 발굴로 참신하고 다양한 역사 이야기가 펼쳐진다.
이 역사 속 주인공 허홍무는 바로 저자의 외할아버지다. 저자는 왜 외할아버지의 구술사를 쓰게 됐을까. 저자의 설명은 이렇다.
충남 아산 사람의 경험 속 ‘인천 현대사’
개인의 생애로 부평 조병창 역사 짚어봐
“한 개인의 경험과 기억은 어떻게, 거대한 역사의 줄기와 연결되는가. 우리가 배운 거시적 역사상은 개인의 목소리를 잘 담지 못한다는 한계를 지닌다. 그렇다고 한 개인의 경험과 기억에 집중하다 보면 그 시대가 가진 구조적 배경을 파악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이 둘을 적절히 배합할 순 없는 걸까. 어느 개인의 구술을 넘어, 시대의 맥락까지 함께 조명하는 방법은 없을까. 이 책은 이러한 고민을 담아 구술사 쓰기를 시도한 나름의 결과물이다.”
충남 아산 토박이의 구술사가 인천 부평으로 연결된다. 허홍무 일가는 1930년대 ‘금광 사업 열풍’을 타고 충남 청양군에서 금광 사업에 도전했다가 무리한 투자로 쫄딱 망했다. 당시의 기억을 허홍무는 이렇게 얘기한다.
“결국 풍비박산이 난 거야. 할아버지는 신운리에서 충격으로 돌아가셨어. 나 여덟 살때 아버지가 일본 사람이 경영하는 무기 공장에 취직을 해 가지고 사택을 지원해서 갔어. 당시 부평에 미쓰비시 공장이 있었어. 거기 취직했다고. 거기 근무하는 사람에 한해서 방 한 칸, 부엌 한 칸으로 된 집을 빌려줬어.”
하루아침에 몰락한 아산 영인면 유지의 아들 허용, 즉 허홍무의 아버지는 인천 부평의 군수공장에 취직했다. 허홍무의 아버지가 들어간 공장은 ‘미쓰비시제강 인천제작소’다. 부평은 일제의 한반도 병참기지화의 핵심 시설인 대규모 군수공장 ‘일본육군조병창’을 중심으로 민간 군수기업 공장들이 포진한 “거대한 산업클러스터”였다. 전국에서 사람이 몰렸다.
저자는 허홍무의 아버지가 부평으로 올라온 때를 1943년으로 추정했다. 허홍무는 해방 전까지 2년 동안 부평에서 사택에 살면서 학교를 다녔다고 한다. 그 사택은 현재도 일부 남아있는 ‘미쓰비시 줄사택’일 것이다. 허홍무는 부평소화동공립국민학교(현 부평동초등학교)로 추정되는 학교에서 일본인 교사에게 많이 맞았던 기억이 남았다. 허홍무의 아버지는 마음대로 퇴사할 수 없었다. 1939년 공포된 ‘국민징용령’으로 외형으로는 계약직 형태의 취업이었지만, 실제로는 강제 동원이었다.
해방 직전 부평 일대에 미군 폭격기가 날아다녔다고 한다. 이에 관한 허홍무의 구술이다.
“해방되기 직전에는 미군 B-29 비행기가 부평으로 뱅뱅 돌아가며 폭격한다고 막 난리였어. 집집마다 방공호가 있었어, 사택 옆에도. 학교에서는 지하실로 다 들어갔지.”
저자는 일본 당국이 1945년 5월과 7월 인천에 미군기의 공습이 있었다고 시인했다는 자료를 밝히며 허홍무가 목격한 미군의 ‘B-29’ 폭격기가 실제 부평 쪽에 폭격을 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부평 조병창에서 일했던 다른 이들의 구술에서도 폭격기 목격담은 등장한다.
일제의 패망으로 군수공장들이 문을 닫자 귀향하는 과정을 회고하는 부분도 흥미롭다.
“미쓰비시 공장에 다니던 아버지가 가자고 해서 (아산) 인주면 금성이로 간 거야. 기차는 그때 댕겼으니까. 옛날에는 기차가 요즘 같은 게 아니고 연탄을 때어 가지고, 기차 한 번 타고 나면 탄가루가 칸칸마다 날려서 타고 오면 콧구멍이 새까맣던 시절이었다고. 부평역에서 서울역 거쳐서, 그것도 말이야, 얼마나 기다렸나 몰라. 기차 안에 사람도 많았어. 그러고 시골로 갔지.”
인천 부평 조병창과 군수공장들은 강제 동원의 현장이었다. 그러나 이에 관한 자료가 적고, 구술도 귀하다. 더 사라지기 전, 그 증거를 기억하고 기록해 후세에 남겨야 한다. 곧 개방될 옛 일본육군조병창 자리이자 미군기지였던 ‘캠프마켓’에 새겨야 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허홍무 이야기는 생각지도 못했던 멀리 충남 아산에서 전해 온 인천에 대한 귀중한 구술이다. 한 사람, 한 사람의 경험과 기억이 이렇듯 소중하다.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