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 죽음·정적의 박해 속에 귀양길

부인과 자식 두고 18년 헤어져 살아

가슴 절절한 부부 연 담은 ‘회근시’

혼인 후 60주년, 시 읊고 세상 떠나

인간 정약용의 삶, 가슴 먹먹해져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는 두물머리에 있는 정약용 생가와 묘지. /최철호 소장 제공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는 두물머리에 있는 정약용 생가와 묘지. /최철호 소장 제공
최철호 성곽길역사문화연구소 소장
최철호 성곽길역사문화연구소 소장

‘60년 세월 눈 깜짝할 사이 흐르고, 복사꽃 활짝 핀 봄 신혼 그날 같네. 살아 이별 죽어 이별 세월 가니, 슬픔 짧고 기쁨 길어 은혜에 감사하네’.

60년 부부 인연을 가슴 절절한 시로 옮긴 정약용 ‘회근시(回卺詩)’다. 15세에 꽃다운 소녀와 혼인 후 60주년에 시 읊고, 그날 세상을 떠났다. 삶과 죽음이 무엇인가? 정약용은 광주와 양주 사이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는 두물머리에서 나고 죽었다. 남양주에 생가와 묘지가 있다. 묘지명도 회갑에 직접 썼다. 행복일까, 불행일까. 친숙한 인물이자 범접할 수 없는 그를 만나러 간다.

한남대교 지나 한강을 거슬러 올라간다. 강물 따라 동호에서 송파강 지나 검단산과 예빈산 사이 팔당호에 이른다. 안개 자욱한 두물머리에 물안개 사라지듯 그의 삶을 보니 가슴이 먹먹하다. 해 뜨는 아침 산 위에 산이 있고, 강물 속에 또 강이 흐른다. 정약용은 여유당(與猶堂)에 모인 친척과 후학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나눈다. 회혼례에 부인 홍혜완에게 시로 미안함과 고마움을 전한다. 두 청춘은 지독히 사랑했다. 광주 마재와 한양 회현방에서 만나고 또 헤어졌다.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두물머리에 있는 정약용 생가 ‘여유당’. /최철호 소장 제공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두물머리에 있는 정약용 생가 ‘여유당’. /최철호 소장 제공

정조 죽음과 정적의 박해 속에 귀양을 간다. 한강 변 광주와 바닷가 강진에서 40살에 생이별하였다. 영영 만날 수 없는 유배지에서 부인과 자식을 두고 18년 헤어져 살았다. 해배 후 다시 돌아온 두물머리에서 묘지명도 홀로 쓴다. ‘자찬묘지명’ 글처럼 여유당에서 회혼식 날 눈을 감았다. 정약용은 출세와 무관하게 한강 따라 유유자적 살았다. 아버지 정재원도 아들이 고향에서 평범하게 살기를 원했다. 하지만 어머니 죽음과 경제적 어려움으로 아버지 관직을 따라 형과 함께 공부하였다.

도성 안 목멱산 기슭에서 혼인 후 초시와 회시 그리고 대과에 합격하며 정조 눈에 단박 들었다. 정조는 정약용에게 성리학자에서 실학자와 과학자로 변신을 청했다. 2천여 명이 한강을 건널 수 있는 완벽한 배다리도 청한다. 그리하여 정약용은 주교(舟橋) 설계 및 배다리 건설까지 한다. 수원 화성(華城) 책임자로 새로운 수레 ‘유형거’와 ‘거중기’ 덕분에 2년9개월만에 화성도 완성한다. 정약용은 과학자이자 건축가로 동양의 레오나르도 다빈치로 불리는 천재다.

그는 동양 최고의 설계자이자 부강한 미래를 제시한 정치 공학자이며 법학자였다. 또한 2천500여 시를 남긴 시인이다. 하지만 정약용에게 큰 시련이 온다. 정조 죽음과 신유박해 소용돌이에 수많은 친인척이 죽임을 당한다. 천주교 신자인 셋째 형 정약종 죽음과 조선 최초 세례자인 매제 이승훈 죽음, 그리고 황사영 백서사건까지 시련이 닥쳤다. 정약용은 둘째 형 정약전과 함께 흑산도와 강진으로 유배길에 오른다. 안타깝게도 남양주 여유당(與猶堂)에서 40살에 폐족이 되었다.

2025년 강물과 산 위에 떠오른 꿈과 희망을 품은 새해. /최철호 소장 제공
2025년 강물과 산 위에 떠오른 꿈과 희망을 품은 새해. /최철호 소장 제공

한강 건너 첩첩 산속 다산(茶山)에서 18년 유배 중 두 아들과 딸에게 끝없는 당부 말을 전했다. 책 읽기를 권하고, 홀로 있는 부인께 미안함도 편지로 전했다. 복숭아뼈가 세 번이나 뚫리는 아픔과 고통에도 499권 책을 냈다. 거센 강바람이 부는 소한 추위에 200여 년 전 정약용 삶처럼, 한 해가 힘들게 지나갔다. 2025년 새해 남양주 두물머리에서 인간 정약용을 다시 만나고 싶다.

/최철호 성곽길역사문화연구소 소장

<※외부인사의 글은 경인일보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