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집회, 대한민국 분열·적의 압축

포용은커녕 최소한 예의조차 잊어

진실 드러나도 증오·적대감은 계속

진영간 대립 속 정서적 거리 아득해

내편이 아니면 적이되는 현실 암담

임병식 중국 탕산해운대학 초빙교수·前 국회 부대변인
임병식 중국 탕산해운대학 초빙교수·前 국회 부대변인

새해 두 번째 맞는 주말, 광화문 일대는 을씨년스럽고 혼란했다. 한쪽에서는 윤석열 체포를, 다른 한쪽에서는 더불어민주당을 밟자는 함성이 차가운 공기를 달궜다. 중립지대가 된 세종문화회관을 사이에 두고 양 진영은 거친 말의 공방을 주고받았다. 윤석열 체포 쪽은 젊은 세대가, 탄핵 무효 쪽은 나이든 이들이 주축을 이룬 가운데 자신들의 신념을 확인했다. 이들이 두 진영을 정확히 비례 대표하는 건 아닐 것이다. 하지만 광화문 일대와 대통령 관저, 헌법재판소 앞에서 반복되는 대규모 정치집회는 대한민국이 처한 분열과 적의를 압축하고 있다.

평온한 일상으로 회복 시기를 가늠하기 어려운 때 미국 카터 대통령의 장례식 보도에 눈길이 갔다. 뉴욕타임스(NYT)는 “생존해 있는 전·현직 대통령 5명이 모두 모여 당파적 무기를 잠시 내려놓고 카터 전 대통령에게 작별을 고했다”고 전했다. 외신 보도에 따르면 9일(현지 시간) 워싱턴DC 국립 대성당에서 진행된 민주당 소속 카터 전 대통령 국가 장례식에 조 바이든 대통령을 비롯해 트럼프 대통령 당선인과 빌 클린턴, 조지 W 부시,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이 참석했다. 전·현직 대통령 5명의 소속 정당은 민주당과 공화당으로 뒤섞였다.

이념과 정파를 초월한 장례식은 미국 국민들에게 통합 메시지를 전했다. 트럼프는 붉은색(공화당 상징) 넥타이 대신 민주당을 상징하는 푸른 넥타이를 맸다. 트럼프는 공개석상에서 여러 차례 카터를 “최악의 대통령”이라고 비난한 바 있다. 그런 트럼프조차 최소한 예의를 표한 것이다. 1976년 대선에서 카터에게 패한 공화당 포드 전 대통령이 생전에 미리 써둔 추도사도 눈길을 끌었다. 포드는 셋째 아들이 대독한 추도사에서 “카터와 나는 정적이었지만 서로 존중하는 사이였다. 이는 공유하는 가치가 있었기 때문이다. 정직과 진실함은 카터라는 이름과 동의어다”라며 추도했다. AFP통신은 “분열된 미국에 국민적 통합의 순간을 가져왔다”고 평했다.

정치적 갈등을 뛰어넘어 상대를 애도하고 포용하는 관행은 미국 정치가 보여주는 품격이다. 그들은 정치적으로는 불편할망정 상대에 대한 예의와 포용을 망설이지 않는다. 2018년 12월, 부시 대통령 장례식에서는 클린턴 대통령이 진심을 담아 추도했다. 두 사람은 대선에서 승자와 패자로 갈렸다. 당시 언론은 부시가 클린턴 당선자에게 남긴 편지를 소개했는데, 부시는 “이 편지를 읽은 때쯤이면 당신은 ‘우리의 대통령’이 되어 있을 겁니다. 당신의 성공은 우리 모두의 성공입니다. 당신을 열렬히 응원하겠습니다”라며 진심으로 성공을 기원했다.

지난주 제주 추사 기념관을 다녀왔다. 명문가 자제에다 고위 관료를 지낸 추사 김정희는 제주 유배지에서 인생의 쓴맛을 절감했다. 잘나갈 때 파리 떼처럼 꾀었던 사람들은 추사가 곤경에 처하자 하나같이 외면했다. 오직 한사람, 제자 이상적만 변함없이 유배지를 찾아와 추사를 위로하고 말동무가 됐다. 냉정한 세상인심을 깨달은 추사가 이상적에게 써준 글과 그림이 국보 ‘세한도(歲寒圖)’다. 추사는 ‘날이 추워지니 비로소 소나무와 측백나무가 시들지 않음을 알 수 있다(歲寒然後知 松栢之後凋)’는 논어 구절을 인용해 이상적의 의리에 답했다.

한 달 넘게 우리 사회를 뒤덮는 광풍도 언젠가는 걷힐 것이다. 그때가 되면 옳고 그름은 드러난다. 문제는 진실이 드러나도 인정하지 않는 분열과 증오, 적대감이다. 언제부터인지 한국 정치는 포용은커녕 최소한 예의조차 잊었다. 윤석열은 야당을 파트너로 인정하지 않았고, 야당은 윤석열을 대통령으로 예우하지 않았다. 진영대결을 벌이는 광화문과 보신각 사이 물리적 거리는 수백m에 불과하지만 정서적 거리는 아득하다. 심리적 내전을 치르고 있는 우리 정치에서 내편에 서지 않으면 적이 되는 현실은 암담하다.

때로는 비언어가 진실에 가깝다. 가슴에 손을 얹고 작별 인사를 건네는 미국 대통령들 사진에서 트럼프만 눈을 감은 채 손은 아래를 향하고 있다. 마지못해 참석했다는 불편함이 고스란히 묻어난다. 그럼에도 트럼프를 손가락질 할 수 없는 건, 돌아올 돌팔매가 두려워 시늉조차 낼 수 없는 우리 정치가 지닌 한계 때문이다.

/임병식 중국 탕산해운대학 초빙교수·前 국회 부대변인

<※외부인사의 글은 경인일보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