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 균열·몰락 다룬 ‘붉은 낙엽’
범인 추적중 숨겨진 진실 드러나고
물음의 전환 통해 이야기 본질 탐구
새 가족의 형태 인정하고 받아들여
가족 서사 새롭게 구축해야할 시대
연극 ‘붉은 낙엽’(토머스 H. 쿡 원작, 김도영 각색, 이준우 연출, 1월8일~3월1일, 국립극장 달오름)은 한 가족에 관한 이야기이다.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집에 세 명이 살고 있다. 아버지(에릭 무어), 어머니(바네사 무어), 그리고 아들(지미 무어).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 지미의 삼촌(웨렌 무어)이 살고 있고, 할아버지(빅터 무어)는 요양원에 있다. 이 작품은 안락하고 견고해 보이는 가족이 균열하고 몰락하는 과정의 서사를 다루고 있다.
무대는 거실이다. 가족 서사를 다루는 작품은 대부분 거실에서 이야기가 펼쳐진다. 이때 현관 출입문이 이야기의 문턱이다. 이야기는 문턱을 넘어 바깥에서 안으로 들어와야 한다. 사건이나 정보가 문턱을 넘어 바깥에서 안으로 들어와야 이야기가 폭발한다. 이야기를 실어나르는 인물이 있어야 문턱을 넘을 수 있다. ‘붉은 낙엽’을 관람하는 포인트 중의 하나는 현관 출입문을 넘어 들어오는 인물과 소식에 따라 에릭, 바네사, 그리고 지미의 반응이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살피는 일이다.
“애가 없어졌어.” 이야기가 폭발하는 사건이다. 이웃에 사는 8살 에이미가 사라졌다. ‘붉은 낙엽’은 표면적으로 에이미의 실종 사건을 해결하는 과정의 이야기이다. 이러한 형식은 범인이 누구인지를 추적하는 구조를 갖는다. 범인이 밝혀지면 이야기는 끝난다. 하지만 범인이 누구인가를 찾는 이야기는 항상 그 이면에 다른 질문을 간직하기 마련이다. 겉으로는 범인이 누구인가를 묻고 있는 듯 보이지만 범인이 누구인지 밝혀지는 과정에서 전혀 다른 질문으로 옮겨가게 된다.
대표적인 사례가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이다. 라이오스 왕을 살해한 범인은 누구인가? 이 물음에서 시작한 이야기는 범인을 찾아가면 갈수록 ‘누가 범인인가?’라는 물음이 어느새 다른 질문으로 바뀌어 있다. 오이디푸스가 범인을 추적하면 할수록 오이디푸스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떨쳐버리지 못하게 된다. 종국에는 자기 자신이 라이오스의 아들이라는 진실에 이르게 된다. 이처럼 물음을 바꾸는 장치야말로 이야기의 힘이다. ‘붉은 낙엽’에서도 마찬가지로 범인을 찾아가는 과정의 이면에는 한 가족이 만나야만 하는 진실이 자리하고 있다.
1인 가구의 시대에도 가족 서사의 드라마를 쓸 수 있을까. 아마도 불가능할지 모른다. 혼자서는 독백밖에 할 수 없으니 말이다. 정상 가족이라는 모델을 굳건하게 상정하고 그 틀에서 벗어나는 가족의 형태를 우리 사회가 인정하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우리는 가족 서사의 드라마를 쓸 수 없을지도 모른다. 4인 가구 중심에서 1인 가구 중심으로 바뀌는 속도를 가족 서사가 따라가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새로운 가족 모델의 출현을 담기에도 역부족이다. 가족 서사의 드라마를 지난 시대의 유물로만 만나야겠는가. 지금 여기의 가족을 담지 못한다면 우리는 가족 서사를 생산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이제 가족 서사를 새롭게 써야 하는 시대인 것이다.
새해에는 연극과 함께 시를 읽어보자. 먼저 아들이 아버지에게. “그래도 아버지/얼굴도 음성도 기억나지 않는 아버지/함께 찍은 사진 한 장 없는 울 아버지//나는 이제 당신보다 훨씬 나이가 많은데/지금도 아빠와 목욕을 하고 축구를 하고/손을 잡고 걸어가는 아이들을 볼 때면,/거리에서 ‘아들’부르는 소리만 들리면,/멈칫 돌아보며 미소 짓는 눈가에는/긴 강물이 흐른답니다//…//그래도 아버지/당신이 주신 그 불치의 결여 속에서/나는 오늘도 주먹으로 눈물을 훔치며/씩씩한 걸음으로 나의 길을 갑니다/나는 언제나 일곱 살 소년의 눈빛으로/이렇게 파랗게 늙을 줄을 모릅니다”(박노해, 아버지 내 아버지, 부분)
이어서 아버지가 아들에게. “네 파도는 또박또박 네가 타 넘는 것/나는 평평탄탄(平平坦坦)만을 네게 권하지 못한다/…/아들아, 울안에 들어 바람 비끼는 너였다가/마침내 너 아닌 것으로 돌아서서/네 뒤 아득한 배후로 멀어질 것이니/더 많은 멀미와 수고를 바쳐/너는 너이기 위해 네 몫의 풍파와 마주 설 것!”(김명인, 아들에게, 부분).
/권순대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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