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엄 이후 새해까지 시간 더디 흘러

남태령대첩·은박담요 두른 우주전사

세상 온갖 빛이 가득했던 이 겨울은

광장에 선 사람들의 연대일뿐 아니라

생명의 연대가 피어난 계절이었다고

전호근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전호근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지난해 12월3일 밤, 불법 계엄으로 시작된 내란 사태 이후 새해를 맞이하기까지 대한민국의 시간은 참으로 더디 흘렀다. 좋은 일도 있었고 나쁜 일도 있었다. 한강 작가의 노벨상 수상, 불법 계엄을 선포한 대통령에 대한 국회의 탄핵 가결, 직무 정지된 대통령 체포를 촉구하거나 반대하는 수십 차례의 집회와 시위, 새해를 사흘 앞두고 일어난 제주항공 여객기 참사, 내란 수괴 혐의를 받는 대통령에 대한 체포 작전이 경호처의 방해로 실패한 일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숨 가쁜 하루하루가 지나갔다.

지난해 12월10일 자정에는 처음으로 스웨덴 한림원에서 주관하는 노벨상 시상식을 생중계로 지켜보았다. 무대 중앙에 수상자 8명이 나란히 앉아 있었는데, 7명의 백인 남성 가운데 유일한 여성이자 유일한 아시아인, 그리고 유일한 한국인인 한강 작가가 있었다. 그는 시상식이 끝난 뒤 이어진 기념 강연에서 자신이 글을 쓰며 품었던 질문 두 가지를 꺼내놓았다.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는가?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할 수 있는가?” 그리곤 스스로 답했다. 소설 ‘소년이 온다’를 쓰는 동안, 실제로 과거가 현재를 돕고 죽은 자들이 산 자를 구하고 있다고 느낀 순간들이 있었다고. 이어서 소설의 제목에 붙어 있는 ‘온다’는 ‘오다’라는 동사의 현재형이며 소년이 너 또는 당신이라는 이인칭으로 불리는 순간 어둠 속에서 깨어난 과거의 소년이 다가와 마침내 현재의 소년이 된다고 풀이했는데, 나는 해당 작품을 여러 차례 읽은 독자로서 전율을 느낄 만큼 크게 감동했다. 소설 제목을 왜 그렇게 정했는지에 대한 궁금증이 단박에 풀렸을 뿐 아니라 작가 스스로 던진 질문이 어떻게 지금의 현실과 연결되고 있는지 여실히 체감하는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한파가 맹위를 떨치던 지난해 12월21일, 트랙터를 몰고 서울로 진입하던 농민 시위 대열이 남태령에서 경찰에 의해 차단되었다. 경찰은 양방향 도로를 모두 막고 시위대를 고립시켰다. 날은 저물고 바람은 차가운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소식을 들은 시민들이 고립된 이들에게 떡볶이와 김밥과 핫팩을 먼저 보냈고 마침내 응원봉을 들고 농민들과 함께 하기 위해 하나둘 남태령으로 모여들었다. 현장에 있었던 한 농민의 기록에 따르면 그들은 대부분 20·30대 여성이었다 한다. 나는 정말 생각지 못했다. 20·30대 여성들이 농민 시위대와 연대하리라고는.

1월5일 아침, 지난 밤 폭설이 내린 한남동에는 은박 담요를 두르고 밤을 지샌 젊은 시위대가 나라를 지키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들의 모습이 키세스 초콜릿과 비슷하다고 해서 키세스 시위대라는 이름을 붙이는가 하면, 은박 담요가 우주에서 보온을 위해 미 항공우주국(NASA)이 개발한 스페이스 블랭킷이라며, 그들을 우주 전사로 일컬은 재기발랄한 이들이 있었다. 수없이 많은 사진과 그림으로 그 장면이 기록되었지만, 그중에서도 나는 만화가 이정헌이 그린 한 장의 그림을 보고 감동했다. 은박 담요를 두르고 웅크려 앉은 그림 속 주인공의 모습에서 어떤 이는 죽어가는 민주주의를 끌어안고 있는 피에타상을 보았다 했고, 어떤 이는 세상의 고통을 듣는 관세음보살의 대자대비(大慈大悲)한 모습을 보았다 했다.

몇 차례 광장에서 지켜본 그들은 여성이 압도적으로 많았고, 성소수자, 장애인, 비정규직 노동자, 이주노동자들의 깃발이 곳곳에서 나부꼈다. 그들은 특정 정당을 옹호하는 이들이 아니라 평범한 시민들이었다. 시골에서 농사를 짓는 젊은이, 학원에서 수학을 가르치는 강사, 초등학교 교사, 취업준비생도 있었다. 그들은 자유발언 시간에 돌아가면서 마이크를 잡고 저마다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들은 각자 자신이 겪은 고통을 이야기하면서도 다른 이의 고통에 관심을 가지고 함께 하겠다고 이야기했다.

아마도 우리는 이 겨울을 이렇게 기록하게 될 것이다. 선결제와 남태령대첩과 은박담요를 두른 우주 전사와 세상의 온갖 빛이 가득했던 이 겨울은, 광장에 선 사람들의 연대일뿐 아니라 과거가 현재를 돕고 죽은 자가 산자를 구하는 생명의 연대가 피어난 계절이었다고.

/전호근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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