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명 탄 뱃머리 가슴으로 밀어 돌려… 온종일 노 저었다”

 

당시 강상면 900가구… 쉰 적 없어

55년전 양평교 놓여 기억에서 잊혀

장날에는 하루 1천명씩 배 태우기도

남한강 마지막 뱃사공 홍길천씨. 2025.1.16 /장태복기자 jkb@kyeongin.com
남한강 마지막 뱃사공 홍길천씨. 2025.1.16 /장태복기자 jkb@kyeongin.com

양평교는 양평군의 양평읍과 강상면을 잇는 다리다. 1970년에 준공된 직선거리 630m의 대교는 두 지역 간의 거리를 획기적으로 단축시켰다.

양평교가 생기기 이전 너비 4m 남짓한 도선이 있었다. 조선시대 인조(1595~1649) 때부터 있었다고 구전되는 이 배는 강상면 일대가 부락으로 형성되는 데 있어 큰 역할을 했으며 이후에도 출근, 학업, 일상생활 등 주민들 생활에 필수적인 존재였다.

이 배는 2명으로 운행됐는데 당시 주민들은 뱃머리를 잡은 사람을 도선사, 함께 노를 젓는 사람을 도사공이라 불렀다. 55년 전 대교가 놓이며 더 이상 배가 필요해지지 않자 사공들도 자연스럽게 사라져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졌으나 아직 그 물살을 생생하게 기억하는 한 사람이 남아 있다.

1960년대 남한강을 가로질렀던 도선. /홍길천씨 제공
1960년대 남한강을 가로질렀던 도선. /홍길천씨 제공

당시 사공으로 일했던 사람 중 유일하게 생존해 있는 홍길천(86)씨는 “그땐 양평읍에서 강상면을 가는데 30~40분이 걸렸다. 50명이 탄 배의 뱃머리를 내 가슴팍으로 밀어서 돌렸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힘이 장사였다”며 “배가 아니면 건너갈 다른 방법은 없었다. 당시 강상면 인구가 900가구 정도였는데, 양평대교가 쉬지 않는 것처럼 나도 쉰 적이 없었다”고 그 당시를 회상했다.

배는 3.5m 너비의 차량용 도선, 2m 너비의 80인승 배, 1.5m 너비의 50인승 배 3대로 운항했다. 주민들은 1년에 두 번 쌀, 보리를 10㎏씩 내는 것으로 뱃삯을 대신했으며 외지인은 한 번에 1천원씩 주고 이용했다.

홍씨는 “사람 70~80명이 타는 건 기본이요, 자동차 2대도 싣고 노를 저었으며 장날엔 배 위 가득 40마리씩 소를 태우기도 했다”며 “양평장이 열리는 날이면 적어도 하루에 1천명은 배를 탔다. 쉬고 밥 먹을 시간이 없어서 온종일 노를 젓다 막걸리로 목을 축였고, 다른 뱃사공 형님의 아내가 머리에 밥을 이고 왔다”고 말했다.

그는 마차로 물류 운송을 하다 1967년부터 노를 젓기 시작했다. 그 당시 함께 배를 탔던 5명의 다른 아버지뻘 사공들은 2002년을 마지막으로 작고해 현재 그때를 기억하는 건 홍씨뿐이다.

폭우로 남한강 물이 넘치면 양평읍 쪽에 거주하는 학생들이 ‘강상 학생들 등교하지 마’라고 소리쳤던 기억, 그 당시 내무과장이던 신영춘 전 양평군수를 급한 일로 새벽에 관청까지 태워줬던 일 등 지금은 생각할 수 없는 여러 이야기들이 그의 입에서 나왔다.

현재 양평읍(아래쪽)과 강상면(위쪽)의 전경. 사진에 보이는 다리는 1997년 준공된 양근대교. /양평군 제공
현재 양평읍(아래쪽)과 강상면(위쪽)의 전경. 사진에 보이는 다리는 1997년 준공된 양근대교. /양평군 제공

다리가 생긴 이후 현재 강상면은 4천600여 가구까지 인구가 늘었다.

홍씨는 “다른 사람들은 양평읍과 강상면을 건너는 게 당연해도 난 지금 다리를 건너면 감개무량하다”며 “일이 끝나면 목을 축였던 막걸리 한 사발이 그립다”고 추억했다.

양평/장태복기자 jkb@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