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산시 단원구 반월공단에 있는 중소기업에서 현장실습을 하다 투신해 크게 다친 특성화고 학생이 사고 발생 8년 만에 뒤늦게 산업재해를 인정받았다.

서울고등법원 행정10-3부(하태한 부장판사)는 지난 10일 박모(26)씨가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낸 산재 요양급여 불승인처분 취소 사건의 항소심에서 1심을 뒤집고 박씨의 손을 들어줬다. 박씨가 특성화고 3학년이던 지난 2017년에 사고를 당한 지 8년 만이자, 공단에서 요양급여 불승인처분을 받은 지 4년 만에 산재를 인정받은 것이다.

박씨는 만 18세였던 2017년 11월16일 안산 반월공단의 플라스틱 제조회사에서 현장실습생으로 일하던 중 이 회사 4층 옥상에서 투신해 중상을 입었다. 박씨는 같은 달 7일 회사와 근로계약을 체결하고 원료 배합업무를 하며 배합물의 양을 제대로 맞추지 못하는 등 실수로 인해 심적인 부담을 느껴왔다. 심지어 박씨는 선임 직원으로부터 욕설과 질책을 듣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박씨는 교육받은 내용을 잊지 않기 위해 공책에 “(원료를) 부은 후에 용량은 반드시 메모! 월급 날아간다”고 적었다.

박씨는 그러다 회사에서 겪은 일에 대해 하소연하기 위해 담임교사에게 전화를 걸었으나, 공감은 얻지 못하고 도리어 ‘스스로 잘못한 게 없는지 생각해보고, 버티라’는 취지의 답을 들었다. 박씨는 전화를 마친 뒤 곧장 회사 4층 옥상에 올라 뛰어내렸다. 다행히 생명을 지켰으나, 머리와 다리 등 신체 곳곳이 골절되고 뇌손상을 입는 등 크게 다쳤다.

■공단·1심 “업무 관련성 떨어져”

이와 관련 공단은 박씨가 낸 산재 신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당시 공단은 “통상적인 업무 범위를 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며 “박씨가 뇌전증(기왕증)으로 치료를 받았으며, 개인적인 가족사와 경제적 부담 등 다른 요인을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불승인 처분했다.

박씨 측이 공단 판정에 불복해 제기한 행정소송 1심도 공단의 손을 들었다. 1심 재판부는 박씨의 업무가 비교적 단순 업무였고, 제출 증거 등 제반 사정에 미뤄봤을 때 극복하기 어려운 업무상 스트레스 요인에 노출됐다고 보긴 어렵다며 원심 청구를 기각했다. 공단과 마찬가지로 산재 판정의 핵심 요건의 ‘재해와 업무 관계성’의 상관관계가 떨어진다고 봤다.

■‘학생 관점·업무 스트레스 커’ 2심서 산재 인정

그러나 항소심인 2심 재판부 판단은 달랐다. 2심 재판부는 “원고(박씨)는 극심한 업무상 스트레스로 정상적인 인식 능력이나 행위선택 능력, 정신적 억제력이 현저히 저하된 정신장애 상태에 빠져 이 사건에 이르게 된 것으로 볼 수 있다”며 “원고의 업무와 이 사건 및 그로 인한 상병 사이에 상당한 인과관계를 인정할 수 있다”고 판시했다.

2심 재판부는 당시 고3 학생이었던 박씨가 현장에 나간 지 1주일 정도 지났을 무렵 원료 배합 업무 중 실수를 저질러 회사에 상당한 손실을 입혔고, 이로 인해 박씨 주장대로 회사 직원들로부터 질책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다고 봤다. 이에 재판부는 “원고로서는 담임교사에게 하소연하는 것 외에는 다른 해결책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며 “극도의 우울감, 절망감에 빠져 재해가 난 것”이라고 설명했다.

박씨의 기왕증(기존의 질환)이 사건 발생의 한 요인이라는 공단 주장과 관련 재판부는 “약물로 조절되고 있었으며, 일상생활에 지장이 없는 정도”라며 “원고 가족의 주거가 불안정했던 것으로 보이긴 하나 사건 경위에 비춰 볼 때 원인이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판단했다. 그러면서 “(기왕증이) 원고에게 내재했던 취약 요인으로 보더라도, 이 회사에서 겪은 어려움과 취약 요인을 겹쳐 정신적 억제력이 저하됐다고 봐야 하는 것이지 ‘사회 평균인’을 기준으로 인과관계 유무를 판단해선 안 된다”고 덧붙였다.

박씨를 대리한 유승희(법무법인 원곡) 변호사는 “2심 재판부에서 박씨 기왕증이 일상생활에 큰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원고 측이 새로 제출한 의료기록을 인정했다”며 “무엇보다 ‘사회 평균인’의 관점이 아닌, 학교로 다시 돌아가기 어려웠던 사정 등 당시 만 18세였던 학생 현장실습생의 입장을 재판부가 폭넓게 고려한 결과”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박씨가 큰 부상을 당한 탓에 경찰 초기 조사 등에서 진술과 주장이 공단과 회사쪽으로 기울었을 수밖에 없었을 사고 당시 상황도 감안이 된 의미 있는 판결”이라고 짚었다.

■구의역 김군·‘다음 소희’ 비극 반복 않으려면

전국특성화고노동조합은 이날 2심 판결 결과를 두고 “사고가 났던 2017년 당시에는 영화 ‘다음 소희’처럼 부당한 대우를 받더라도 실습생들이 학교에 복교할 수 없었고, 복교 후에도 학교에서 반성문을 쓰거나 청소를 하는 등 학생들이 회사에서 떠나지 못하도록 억업받기 일쑤였다”며 “늦었지만 이제라도 박씨의 산재 인정이 이뤄진 것을 환영한다”고 밝혔다.

박씨 사고 외에도 사고 당시를 전후로 구의역 김군(2016년), ‘다음 소희’ 배경이 된 홍수연양(2016년), 제주 현장실습생 이민호군(2017년) 등이 사망하는 일이 있었다.

특성화고노조는 “영화가 이슈가 되며 직업교육훈련촉진법에 ‘직장 내 괴롭힘 금지’, ‘강제근로 금지’ 등의 조항이 추가됐지만, 여전히 실습생은 ‘학습근로자’라는 신분으로 근로기준법조차 적용받지 못하고 있다”며 “더 이상 사고가 반복되지 않도록 근로기준법 적용대상에 포함시켜 최소한의 법의 보호를 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유 변호사는 “박씨 사건 이후 현장실습생들이 죽거나 다치는 사건이 많았고 이들을 위해 제도가 바뀌는 등 변화가 있었지만, 현장은 여전히 열악한 게 현실”이라며 “이번 2심 판결이 박씨처럼 어린 나이의 실습생이 재해를 입었을 경우, 회사와 학교 등에 어떻게 책임을 물어야 할지 하나의 기준이 될 것으로 보고 있다”고 말했다.

/조수현기자 joeloach@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