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으로 복종 강요 더 이상 불가능
불합리한 통제 저항한 시민들 덕에
과거 권위주의 시대로의 회귀 막아
변화 위해 새 질서·가치체계 만들고
시민 주도로 역할하는 방안 찾아야
12·3 계엄은 아직 종식되지 않았다. 제2, 제3의 계엄까지 도모했던 집권 세력의 집요함은 대통령 개인을 넘어서 여당과 극우파들에게 생존의 이데올로기로 여전히 작동하고 있다. 어떻게 해야 기득권 진영의 이데올로기 공세를 막아낼 수 있을까?
스웨덴 사회학자 테르본(G.Therbon)은 ‘이데올로기의 권력, 권력의 이데올로기’라는 저서에서 이데올로기는 자체 모순을 잉태한다고 설명한다. 복종과 자격부여라는 개념을 사용하여 지배 질서가 어떻게 재생산되고, 어떻게 변화할 수 있는지를 해석한다. 이데올로기는 개인을 특정 권력 구조와 질서에 복종시킨다. 인간의 존엄성과 자율성을 억압하는, 예컨대 계급·성별·인종에 따른 사회적 위치를 개인이 수용하고 나아가 복종하게 만든다. 동시에 이데올로기는 개인에게 사회 내에서 기능적 역할을 수행할 자격을 부여한다. 이는 교육, 기술, 사회적 기대를 통해 특정한 능력을 부여하는 과정이다. 자격 부여는 복종을 통해 형성된 틀 안에서 개인이 주체적으로 행동할 수 있게 한다.
그런데 이러한 복종이 지나치게 강압적이거나 불합리하게 느껴질 경우 반란이 일어난다. 기존 이데올로기 틀을 깨려는 저항의 형태로 나타나며, 기존의 복종과 지배 구조를 일시적으로 흔들 수 있다. 혁명 또한 가능하다. 기존 질서의 파괴를 넘어 새로운 자격 부여 체계를 구축하려는 시도이다. 혁명은 기존 이데올로기 질서를 근본적으로 뒤엎고 새 권력관계와 이데올로기 틀을 제시하려는 것이다.
우리는 군사독재 시대에 저항하면서 어렵사리 민주공화국의 주인으로서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1987년 개헌을 통해 대통령 직선제를 쟁취했고 이후 문민정부를 가능하게 했다. 그리고 촛불혁명으로 대통령을 탄핵하였고 이제 다시 ‘빛의 혁명’을 통해서 현직 대통령을 체포하고 탄핵을 목전에 두고 있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수많은 시민의 놀라운 행동을 목도했다. 국회에 파견된 군인들의 주저하던 소극적 행동, 이를 막아선 시민들의 용감한 항거, 국회의원들의 신속한 의사결정, 세대를 초월한 여의도 집회에서의 함성, 눈 내리는 한남동 관저 앞 밤을 새우던 ‘키세스 기사단’, 그리고 용감한 불복종을 보여준 경호처 경호원들. 불합리한 통제에 저항하는 수많은 시민의 용감한 불복종이 없었다면 비상계엄이 성공하여 과거 권위주의 시대로의 회귀를 막을 수 없었을 것이다.
무엇이 이러한 용감한 불복종을 가능하게 하였는가? 테르본의 설명에 따르면 시민들의 역량과 지적 수준은 성장한 반면, 억압적인 지배 질서가 지나치게 불합리하고 강압적인 복종을 강요할 때 균열이 일어난다. 21세기 대한민국에서 비상계엄은 통하지 못한다는 점을 분명히 드러냈다. ‘깨어 있는 시민’이 있는 한국 사회에서 군사적, 물리적 힘으로 복종을 강요하는 것은 더 이상 불가능하다. 그만큼 우리 국민은 역사적 경험을 통해 민주주의를 학습했고 주권을 지킬 수 있는 용기를 가지게 되었음을 증명하고 있다. 기득권 진영이 오직 자기방어만을 위해 국민에게 강요하는 복종을 이겨내는 힘은 시민의 역량과 높은 의식이다. 세계 최고의 ‘교육열’이 있어서 가능한 놀라운 성취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집요하게 복종 이데올로기의 부활을 꿈꾸는 그들에게 나라의 미래를 다시 빼앗기지 않으려면 일시적 저항에 그쳐선 안된다.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수많은 문제를 드러내고 근본적인 사회변화를 추구하기 위해서는 새 질서, 가치체계를 만들어야 한다. 단지 기존의 억압적인 복종에 대한 저항을 넘어 이번 사태를 계기로 우리 사회가 지향해야 할 새로운 대전환의 질서를 만들 수 있어야 한다. 역사적 과오는 되풀이될 위험성이 있다. 다시는 망상장애에 빠진 자가 주도하는 독재의 망령이 우리를 불안케 하지 않도록 해야만 한다.
지난 한 달여 동안 용감한 불복종을 보여주었던 수많은 시민이, 이제부터는 주도 세력으로 역할할 수 있는 방안을 찾아야 한다. 광장의 함성을 제도화로 만들어 낼 때, 비로소 지금까지 미뤄왔던 해묵은 과제를 완성해 낼 수 있다. 이는 젊은 세대와 그들의 미래를 위한 새로운 출발점이 될 것이다.
/성기선 가톨릭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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