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화·도판 자료 배접하는 데 쓸 수침 밀가루
디지털라이징 기술과는 다른 전통 보존 기술
사계절 지나 무색무취 순수 전분 결정체 돼
어지러운 세상도 이렇게 정화되면 좋으련만
지난해 물에 담갔던 밀가루를 건져 말리고 있다. 서화나 오래된 도판 자료들을 수선하거나 배접하는 데 쓸 수침 밀가루이다. 지난해 2월에 담갔으니, 춘하추동 네 계절을 지나며 삭고 삭아 더 이상 부패할 수 없는 무색무취의 순수 전분 결정체가 되었다. 풍진 세상도 이렇게 정화되면 좋으련만! 본래는 열달을 기약하고 수침하여 연말에 건져 말리려고 했으나 이럭저럭 해를 넘겼다.
배접은 디지털라이징 기술과는 다른 전통적 원본 보존 기술이다. 작품이나 자료에다 한지를 덧붙이는 단순한 작업에 불과하지만 결과는 놀랄만하다. 우글쭈글 접혀 있던 자료들은 다림질한 듯 팽팽해지고, 찢어져 너덜거리던 자료들도 초배접 한번으로 제 모습을 찾을 수 있다. 삭아서 만지기조차 힘든 자료들을 복원시킬 수도 있다. 명실상부 ‘재생’이다. ‘멸실’ 직전의 자료가 튼튼한 ‘몸’을 다시 얻는 작업은 그 자체로 즐겁다. 비싼 작품이나 전시용 자료의 배접은 표구사에 맡겨야 하지만 연구자가 일상적으로 쓸 자료는 손수 배접하는 것이 오히려 편하다.
배접하는 작업 과정도 의외로 간단하다. 자료에 물을 뿌려 부드럽게 만든 후에 한지에 묽은 밀가루 풀을 발라 덧붙인 다음 평평한 판에 붙여 말리면 끝난다. 풀을 바르고 종이를 두드릴 두어 자루의 붓만 있으면 누구나 할 수 있다.
배접은 재료와 배접지를 풀로 융착시켜 질기고 탄력 있게 만든다. 물과 풀과 한지가 화학결합처럼 잘 어우러진 결과다. 배접은 서예가나 미술인들에게만 필요한 기술처럼 여겨지고 있지만, 한지를 많이 사용했던 예전에는 일상 기술이었다. 지금도 오래된 문서나 자료를 다루는 연구자들에겐 쓰임새가 많아 익혀 둘 만하다.
서화의 배접을 장황(粧䌙)이라 불렀는데 장황에는 풀이 중요하다. 오랫동안 물에 담가 삭힌 수침 밀가루를 주로 사용했다. 장황 풀을 만드는 방법은 문헌마다 다르다. 조선시대의 생활백과사전 격인 ‘산림경제’(山林經濟)에는 5~10일간 삭힌 밀가루에 백급(白芨)을 섞어서 만드는 제조법을 소개하고 있다. 또 다른 생활백과인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의 이운지(怡雲志) 편에서도 여러 가지 장황 풀 만드는 방법을 소개하고 있는데 10~15일간 수침하는 법이 나온다.
배접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들은 밀가루를 6개월, 10개월간 삭혀 써 왔으며 장장 2년, 5년, 심지어 7년동안 수침한 밀가루를 사용하는 장인들도 있다고 한다. 이쯤 되면 배보다 배꼽, 어지간한 작품보다 풀이 더 귀하신 몸, 밀가루가 아니라 황금가루라 해야겠다. 사실 필자의 자료들이야 개항기에 제작된 지도나 도판, 청일 러일전쟁기의 목판화가 대종이니 열흘 삭힌 풀로도 무방하겠지만 부러 고급 장황에 사용하는 밀가루를 만들어보는 것이다.
옛날 사람들이 밀가루를 오래 수침하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은 것은 서화나 자료를 아끼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일 터이다. 수침 밀가루에 어떤 물리화학적 변화가 생기는지는 과학자들이 밝힐 일이다. 수침을 통해 밀가루에 포함된 단백질이나 기타 영양물질은 오래 삭혀서 제거되고 순수한 밀가루 전분 결정질만 남게 되는 모양이다. 글루텐 성분이 제거되어 접착력은 감소하지만 그림과 배접지를 부드럽고 고르게 붙일 수 있다. 배접할 때 풀을 묽게 만들어 쓰는 것은 접착력이 약한 것이 더 좋기 때문이다. 그래야 그림이 뒤틀리는 현상을 막을 수 있을 뿐더러 나중 수선이 필요할 때 그림과 배접지가 쉽게 분리되는 것이 유리하기 때문이다.
또 수침법은 영양물질이 제거되면 밀가루가 천연방부제처럼 바뀌어 해충과 부패를 막는 데도 도움이 된다고 한다. 이 수침 밀가루 물을 부어도 덩어리가 생기지 않아 바로 풀어지며, 풀이 맑은 빛을 띠고 오래 두고 써도 상하지 않는다. 물론 밀가루를 가정에서 삭히는 것도 보통 일은 아니다. 주말마다 웃물을 따르고 삭은 찌꺼기나 곰팡이를 걷어내는 일을 끈기 있게 해야 하니 말이다. 어쨌거나 어수선한 시국에도 여생 쓰고 남을 수침 밀가루를 말려 놓았으니 모처럼 한가하다.
/김창수 인하대 초빙교수·객원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