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채식주의자’ 등장인물 영혜
꿈은 정신병자의 말로 비하 당해
문 닫지 못한 채 달리는 택배차량
밥 먹는 작은 동물 쫓아내는 인간
현실 중요한 세상, 사랑할 틈 없어


한강의 ‘채식주의자’는 어렵지 않은 구절들로 써져 있지만, 사실은 이해하기 어려운 소설이다. 포스트잇을 잔뜩 붙인 책과 빼곡히 써내려간 감상노트를 들고, 독자들과 묻고 대답하며 소설 속에 숨겨진 비밀을 하나하나 풀어나가던 중, 소설 속 등장인물인 영혜를 조현병 환자로 규정하는 신문 칼럼을 읽고 깜짝 놀랐다. 작가가 영혜를 병원에 입원시킨 이유는, 그가 치료를 받아야 하는 병적 상태이기 때문이 아니라, 비실용적인 것으로 간주된 무의식과 상상력이 비하되고 격리되는 폭력적인 상황을 고발하기 위해서이기 때문이다.
영혜가 꾼 꿈 속 이야기에는 아무도 관심이 없다. 영혜가 말하고 싶어하는 것들, 꿈과 무의식과 상상력의 영역은 병적인 것으로 치부되어 치료의 대상으로 전락한다. 그런데 진짜 병적인 것은 꿈과 상상이 아니라 꿈과 상상의 영역을 전혀 허용하려 들지 않는 이 세계의 이성중심주의가 아닐까? 영혜의 또 다른 꿈 이야기는 인간이 아닌 나무가 되고 싶다는 것이다. 이번에도 꿈은 현실에서 대답할 가치조차 없는 정신병자의 말로 비하 당한다.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가치만이 인정받는 세계에서 이 두번째 꿈 이야기 또한 제대로 입 열지 못한 채 거절당하고 만다. 우리가 일상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꿈 이야기에 대답하는 대신 영혜의 입을 틀어막아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영혜를 병원에 입원시킨다, 그렇게 꿈을 지우고 무의식을 억누르는 방식으로, 세계의 합리성이 유지된다.
우리가 왜 현실 너머의 것들을 상상하지 못하게 되었을까? 그렇게 교육받고, 그렇게 일하고, 그렇게 살라고 사회가 강요하기 때문이다. 경제적이고 효율적인 인간만이 칭찬받는 혹독하고 빈곤한 세계에서 감수성이 뛰어난 인간은 환영받지 못한다. 그런 이들은 심지어 인간 아닌 취급을 받는다. 하지만 그럴 때일수록 더 역설적으로, 세계가 가장 필요로 하는 사람은 상상하는 인간이다. 불가능한 이야기를 하는 인간이다. 자신이 인간이 아니라고 말하는 인간, 나무가 되고 싶다고 말하는 인간이다.
자정 무렵 동네 길고양이들에게 몰래 밥을 챙겨주러 나왔다. 집 근처 공터에 밥자리를 마련했다가 동네 주민들에게 쫓겨나 자리를 옮긴 터였다. 공터를 향해 걷던 중, 차문을 연 채 달리는 택배차량을 만났다. 배달할 물량이 너무 많았는지 차창을 닫을 겨를도 없이 운전을 하던 기사는, 이번에는 차문을 열어둔 채 빌라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기사는 실수로 문을 닫지 않은 게 아니었다. 더 빨리 배달해야 했기 때문에 문을 닫지 못한 것 같았다.
우리는 왜 배고픈 작은 동물들에게 곁을 내어주지 못하게 되었을까? 늦은 밤까지 쫓기듯 일해도 왜 점점 더 먹고 살기 힘에 들까? 더불어 살아가기보다 남보다 더 잘 사는 것이 우선이 돼버린 세상에서,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건 대체 뭘까? 꿈을 말하는 게 이상해져버린 세상, 오로지 현실만이 중요한 세상에서는 사랑할 틈이 없다. 배고픈 고양이가 들어설 자리가 없고, 창문을 닫을 시간이 없다. 길 동물에게 밥을 줄 장소, 야간 노동자에게 문을 닫을 시간을 되돌려주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소설 속 영혜처럼 누군가에게 그냥 꿈 얘기를 들려주는 건 어떨까? 나무가 되고 싶다고 말해보는 건 어떨까? 영혜의 꿈 이야기가 좀처럼 궁금해 지지 않는 우리들에게 묻고 싶다. 문을 닫지 못한 채 달리는 저 택배트럭이 이상하지 않느냐고 묻고 싶다. 비어있는 공터에서 밥을 먹는 작은 동물들을 쫓아내는 우리 인간들이, 새들이 사는 곳에 공항을 짓는 우리 인간들이 실은 아주 많이 이상하지 않느냐고 묻고 싶다.
현실과 속도에 치여 꿈은커녕 제대로 잠도 못자는 우리들에게 꿈꿀 자유를 주고 싶다. 빠르고 각박하게 돌아가는 세상에 숨 쉬고 상상할 틈을 만들고 싶다. 효율과 경제, 실용적 가치가 전부가 되어버린 세상에 시와 노래, 이야기를 불어넣고 싶다. 익숙해져버린 우리들 자신이 마침내 이상해보일 때까지 말도 안 되는 꿈 얘기를 주구장창 늘어놓고 싶다. 추방당한 꿈들을 다시 세상 속으로 데려오고 싶다.
/최정화 소설가
<※외부인사의 글은 경인일보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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