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 앞 울분의 기자회견
형량 확정되자 충격 어린 얼굴
“누구나 사기 쳐도 됨 증명” 저격
공소장 변경되도 ‘실형’ 어려워
인천 미추홀구에서 전세사기를 당한 피해자들은 ‘엄중처벌’이 적힌 피켓을 수십 번 들었다. 인천지법·지검, 서울고법, 대법원 등 장소도 가리지 않았다. 전 재산을 잃은 상처를 법원이 조금이나마 보듬어주지 않을까 하는 희망이 물거품이 되자, 피해자들은 바닥에 주저앉아 오열했다.
■“믿었던 법이 배신했다” 피해자들 오열
23일 오전 대법원이 인천 미추홀구에서 수백억원대 전세사기를 저지른 건축왕 남헌기(63)씨 등 일당 10명에게 각각 징역 7년이나 무죄, 집행유예를 선고한 원심을 확정하자 피해자들은 법정 밖으로 “어떻게 이런 판결이 있을 수 있느냐”며 울분을 토했다. 판결 소식을 전해 들은 일부 피해자는 믿기 어렵다는 듯 취재진에게 “정신이 없어서 잘 듣지 못했다”며 되물었고, “항소심이 확정됐다”는 말에 얼굴을 감싸쥐었다.
이 사건 1심에서 남씨는 사기죄 법정 최고형인 징역 15년을, 나머지 일당은 각각 징역 4~13년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항소심 재판부는 지난해 8월 사기 혐의 액수 148억원 중 68억원만 인정했고, 공인중개사법 위반 혐의를 무죄로 판단해 남씨에게 징역 7년을, 나머지 피고인에게는 무죄나 집행유예를 선고했다.
미추홀구 전세사기 피해대책위원회(이하 대책위)는 충격이 컸는지 판결 직후 대법원 정문에서 예고한 기자회견을 바로 시작하지 못했다. “대법원을 믿었고, 많은 시민이 도와주셨는데 희망이 물거품이 됐습니다. ‘내 잘못이 아니다’라는 마음을 겨우 붙잡고 있는 분들에게 너무 죄송합니다.” 대책위 한 관계자가 울먹이며 겨우 입을 뗐다.
안상미 대책위원장은 “공인중개사와 집주인이 짜면 누구나 사기칠 수 있다는 것을 법원이 증명했다”며 “지금도 어디선가 전 재산을 잃고 죽음을 선택하는 이들이 있을 텐데 법원의 판결이 이해되지 않는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남은 재판에 악영향… 공소장 변경 필요
이번 판결이 더욱 중요했던 이유는 앞으로 진행될 2·3차 기소 사건을 비롯한 추가 재판에도 영향을 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남씨 등은 인천 미추홀구 일대 아파트와 빌라 세입자 665명으로부터 전세보증금 536억원을 받아 가로챈 혐의 등으로 2023년과 지난해 세 차례에 걸쳐 기소됐다. 이날 열린 상고심은 1차 기소 사건에 대한 것이고, 내달 20일 선고 공판이 예정된 2차 기소 사건은 사기 혐의와 함께 남씨 일당의 범죄집단조직 혐의, 남씨의 100억원대 횡령 혐의도 다뤄진다. 2차 기소 사건 선고는 이날 대법원 기일과 겹치면서 다음 달로 미뤄졌다. → 표 참조
추가 기소 사건을 담당하는 재판부는 이번 대법원 판단을 참고해 판결을 내릴 가능성이 크다. 피해자들은 검찰에 공인중개사법 위반에 대한 공소장 변경 등을 요청할 방침이다.
전세사기 피해자들을 돕고 있는 김태근 변호사는 “검찰은 공인중개사법에서 금지하는 ‘중개의뢰인과 직접 거래를 하거나 거래당사자 쌍방을 대리하는 행위’를 위반했다고 보고 기소했는데, 무죄를 받았으니 추후 재판에서 공소장을 변경해야 한다”고 했다. 다만 “해당 사안에 대해 공소장을 변경해 유죄를 선고받는다 해도 실형이 나올 가능성은 높지 않다”고 덧붙였다.
※ 우울감 등 말하기 어려운 고민이 있거나 주변에 이런 어려움을 겪는 가족ㆍ지인이 있을 경우 자살예방 상담전화 ☎109또는 자살예방SNS상담 “마들랜”에서 24시간 전문가의 상담을 받을 수 있습니다.
/변민철기자 bmc0502@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