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 확정 “이제 그만” 목소리도

특별법 유효기간 임박 대책 촉구

사회적 관심 감소 속 연대 필요성

전세사기 브리핑 관련 빛바랜 전세사기 피해 현수막. 2023.11.01 /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
전세사기 브리핑 관련 빛바랜 전세사기 피해 현수막. 2023.11.01 /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

인천 미추홀구에서 수백억원대 전세사기를 저지른 속칭 ‘건축왕’ 남헌기(63)씨 일당의 형량을 크게 줄인 원심이 최근 대법원에서 확정됐다. 절망한 피해자들 사이에선 “이제 그만하자”며 자조 섞인 목소리도 나온다. 이들은 정부와 국회가 머뭇거리는 동안 사회적으로 많은 변화를 이끌었다. 절망에 빠진 피해자들이 다시 희망을 품을 수 있도록 지역사회의 관심이 절실한 상황이다.

■ 미추홀구를 덮친 전세사기 공포

2022년 여름 인천미추홀경찰서에 전세사기 관련 고소장이 100건 넘게 접수됐다. ‘건축왕’ 전세사기 사건이 막 세간에 알려졌을 때다. 피해 규모는 점점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구청은 ‘전세사기 피해 지원 및 예방을 위한 TF(태스크포스)’를 만들어 지원에 나섰다.

전세사기·깡통전세피해자전국대책위원회 회원들이 지난 2023년 8월 21일 오전 인천시 미추홀구 인천지방법원 앞에서 전세사기 피해 주택의 경매 매각기일을 직권으로 변경해달라고 법원에 요청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2023.8.21 /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
전세사기·깡통전세피해자전국대책위원회 회원들이 지난 2023년 8월 21일 오전 인천시 미추홀구 인천지방법원 앞에서 전세사기 피해 주택의 경매 매각기일을 직권으로 변경해달라고 법원에 요청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2023.8.21 /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

피해자들은 같은 해 11월 ‘미추홀구 전세사기 피해대책위원회’(이하 대책위)를 꾸려 인천시청, 국회, 경찰 등을 오가며 구제책 마련과 남씨 일당 엄벌을 촉구했다. 전세보증금을 떼인 피해자들은 일상을 되찾기 위한 긴 싸움을 그렇게 시작했다. 이듬해 2월 대책위는 국회에서 열린 ‘미추홀구 깡통전세 피해 대책 마련을 위한 긴급토론회’에서 긴급주거 지원, 경매 중지·지연, 대출 연장, 관련 법 개정 등을 요구했다. 국회와 정부가 머뭇거리는 사이에 남씨로부터 전세사기를 당한 20·30대 청년들이 잇따라 세상을 등졌다.

대책위는 전국 각지에서 전세사기를 당한 이들과 힘을 모아 피해 구제를 위한 특별법 제정을 요구했다. 정부는 뒤늦게 경매 유예 조치를 시행했고, 국회는 2023년 6월 경매 우선매수권, 피해 아파트 공공 매입 등이 포함된 전세사기 특별법을 제정했다. → 일지 참조

전국에서 발생한 전세사기 사건의 수많은 피해자 가운데 첫 번째 희생자인 인천 미추홀구 ‘행복마을’ 요셉(가명)의 1주기 추모제가 지난해 2월 24일 서울 종로구 보신각에서 열렸다. 한 참석자가 ‘집은 인권이다! 전세사기 없는 사회 함께 만듭시다’라고 적힌 손 피켓을 들고 있다. 2024.2.24 /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
전국에서 발생한 전세사기 사건의 수많은 피해자 가운데 첫 번째 희생자인 인천 미추홀구 ‘행복마을’ 요셉(가명)의 1주기 추모제가 지난해 2월 24일 서울 종로구 보신각에서 열렸다. 한 참석자가 ‘집은 인권이다! 전세사기 없는 사회 함께 만듭시다’라고 적힌 손 피켓을 들고 있다. 2024.2.24 /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

■ 긴 싸움에도 여전히 남은 과제

남씨 등은 미추홀구 일대 아파트와 빌라 세입자 665명으로부터 전세보증금 536억원을 받아 가로챈 혐의 등으로 2023년과 지난해 세 차례에 걸쳐 기소됐다. 피해자들은 생업을 뒤로하고 2023년 초부터 2여 년간 100여 차례 넘는 재판에 참석하며 남씨 일당의 범행 사실을 증언했다.

남씨는 1차 기소 사건 1심에서 사기죄 법정 최고형인 징역 15년을, 일당 대부분도 실형을 선고받았다. 당시 재판을 담당한 판사는 형을 정하면서 “삶과 희망을 송두리째 앗아간 사기 범죄에 대한 처벌로는 부족하다”며 이례적으로 사기죄 형량에 대한 개정 입법 필요성을 주장하기도 했다.

대법원 양형위원회에선 조직적 사기범죄에 최대 무기징역까지 선고할 수 있는 양형기준안을 마련, 오는 3월께 의결을 앞두고 있다.

미추홀구 전세사기피해 대책위원회 회원들이 23일 서울 서초구 대법원 앞에서 미추홀구 전세사기 속칭 ‘건축왕’ 남헌기씨에 대한 대법원 선고 결과에 관련해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2025.1.23 /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
미추홀구 전세사기피해 대책위원회 회원들이 23일 서울 서초구 대법원 앞에서 미추홀구 전세사기 속칭 ‘건축왕’ 남헌기씨에 대한 대법원 선고 결과에 관련해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2025.1.23 /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

시간이 흐를수록 미추홀구 전세사기 사건에 대한 사회적 관심은 낮아졌다. 그러던 중 지난해 8월 남씨는 항소심에서 징역 7년으로 크게 감형됐다. 일당도 무죄나 집행유예를 선고받아 풀려났고, 대법원은 최근 이를 확정했다.

다음 달 2·3차 기소 사건의 선고 공판과 첫 재판이 각각 예정돼 있다. 검찰은 대법원 판결을 분석한 뒤 남은 재판에서 공소사실을 입증·유지하는 데 집중할 방침이다.

오는 6월1일이 되면 유효기간 만료로 사라지는 전세사기 특별법에 대한 대책도 필요하다. 김태근(세입자114 운영위원장) 변호사는 “전세사기 피해자들은 서로 연대하며 특별법 제정 등 여러 대책을 이끌어 내어 힘든 처지의 많은 이웃을 구했다”고 했다. 이어 “검찰은 대법원이 무죄를 선고한 공인중개사법 위반 부분의 공소사실을 변경해 유죄가 선고될 수 있도록 조치해야 한다”고 했다.

/변민철·백효은기자 bmc0502@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