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역사가 슐레진저가 처음 사용

비난에 손쉽게 동원되는 정치용어

여소야대는 ‘제왕적’이지 못하고

비타협적 정당 간 관계 문제 근원

‘尹의 비극’ 당내 비협력에서 비롯

신철희 경기연구원 선임연구위원
신철희 경기연구원 선임연구위원

우리나라 정치문제들의 근원에 ‘제왕적 대통령제’가 있다는 주장이 끊임없이 제기돼 왔다. 최근 윤석열 대통령 탄핵 사태를 겪으면서 그 주장에 힘이 실리고 있다. 대통령에게 부여된 지나치게 막강한 권한으로 인해 이런 사태가 초래됐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대통령제가 정말 제왕적인가? 그리고 제왕적 대통령제가 정말 문제의 근원인가?

대통령이 헌법과 법률이 정한 한계를 넘어 마치 황제와 같은 권한을 행사하는 행태를 표현하는 제왕적 대통령제라는 용어는 미국의 역사가 아서 슐레진저가 1973년에 쓴 ‘제왕적 대통령제’(The Imperial Presidency) 책에서 처음 사용했다. 슐레진저는 전쟁과 평화를 결정하는 권한을 공유하고 서로 견제해야 하는 대통령과 의회의 관계가 국가적 위기 상황을 겪으면서 정보에 접근이 용이하고 외교권을 독점하는 대통령에게 우세하게 기울고, 대통령이 이렇게 생긴 힘을 국내정치에도 적용하려는 현상을 보고 이 용어를 만들어냈다. 그러나 제왕적 대통령제는 자주 오용되는 정치 용어 중 하나다. 명확한 근거 없이 상대편, 싫어하는 대통령을 비난하고 흔들기 위해서 손쉽게 동원할 수 있는 표현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87년 체제의 산물인 현행 헌법에 대통령의 지위와 권한이 ‘제왕적’이라고 볼 만한 요소가 없는 것은 아니다. 우리나라 대통령은 긴급명령권·긴급재정경제명령권·계엄선포권 등의 국가긴급권, 국민투표회부권, 헌법개정안발의권 등 막강한 권한을 가지고 있다. 검찰, 경찰, 국세청 등을 활용할 수 있는 사정 권한과 대통령에게 행정부 수반을 넘어서 국가원수의 지위와 사면권을 부여한 것은 ‘제왕적’ 이미지를 강화하고 있다.

하지만 대통령제 자체가, 또는 87년 체제가 특별히 제왕적이라고 보기는 힘들다는 것이 학계의 중론이다. 내각제나 다른 통치체제와 다른 대통령제만의 특성을 감안해야 하기 때문이다. 대통령제를 처음 만든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은 영국의 왕에게 저항해서 나라를 세우는 것이었기 때문에 처음엔 왕을 연상시키는 직위에 거부감이 있었지만 전쟁과 위기 상황을 겪으면서 강력한 리더십을 가진 지도자의 필요성에 공감하고 대통령직을 만들었다. 다만 대통령이 권한을 남용하지 못하도록 삼권분립을 통해 서로 견제와 균형을 이루도록 했다.

슐레진저도 막강한 권한을 행사하는 대통령을 무조건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가 위대한 대통령으로 평가했던 앤드류 잭슨, 링컨,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고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 초법적 권력을 휘두르기도 했다. 그는 제왕적 대통령제의 해법이 무조건적인 대통령 권력의 축소가 아니며, 통치를 위한 강력한 대통령과 자유를 위한 권력분립 모두 필요하다는 것이 정말 전하고 싶은 메시지라고 말하기도 했다.

우리가 제왕적 대통령제를 논할 때 주의해야 할 점은 의회와의 관계 속에서 살펴봐야 한다는 것이다. 대통령제에서 흔히 발생하는 분점정부, 즉 여소야대 상황은 얼마든지 대통령을 무력하게 만들 수 있다. 대립적인 의회에 의해 법안, 예산, 인사 어느 것 하나 제대로 행사하지 못하는, 결코 ‘제왕적’이지 못한 상황이 자주 발생할 수 있다. 이런 경우에는 내각과 의회를 모두 장악하는 내각제의 총리보다 나을 것이 없다.

우리 정치의 불안정성과 후진성을 제왕적 대통령제 탓으로 돌리는 것은 무책임하다. 권한을 남용하는 권위주의적이고 위계적인 정치문화, 비타협적인 정당 간의 관계 등이 더 근본적인 문제다. 제도와 사람 모두 중요하지만 자신들의 탐욕과 비타협적인 행태는 고칠 생각이 없으면서 제도를 바꾸면 문제가 해결된다는 주장은 솔직하지 못하며, 그렇게 한다고 해도 결과는 별로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윤 대통령의 비극은 당 내에서조차 협력하지 못하는 무능과 욕심에서 비롯됐다. 만약 자신의 당선을 돕고 경쟁했던 이준석, 안철수, 유승민 등을 적절하게 예우하고 합당한 역할을 줬더라면 이런 사태까지 이르지 않았을 것이다. 백번 양보해서, 우리 대통령제를 ‘제왕적’으로 만드는 것이 있다면 바로 정치인 자신들의 비정치적 태도다.

/신철희 경기연구원 선임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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