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립 취지 무색한 인권위 행보

내란 세력 옹호·인권위원 막말

‘인권’이란 말, 참으로 부끄러워

국가 권력 ‘감시·저항’ 목소리로

시민곁이 제자리란걸 빨리 깨닫길

안은정 다산인권센터 상임활동가
안은정 다산인권센터 상임활동가

‘최후의 보루’라는 말처럼, 인권은 힘없는 이들이 마지막으로 기댈 곳이었다. 국가와 사회로부터 부당한 경험을 당한, 차별받고 소외된 이들의 편이었기 때문이다. 경제적 능력, 사회적 지위 등에 따라 스스로 지킬 힘도 달라지는 한국 사회에서 사회적 약자, 소수자, 국가 폭력 피해자의 곁을 지킨 것도 인권이었다.

인권은 필연적으로 사회적 약자 권리보장을 우선하고, 국가 권력에 맞서 저항해왔다. 또한 비민주적인 사회체제 및 제도, 권력을 감시하고, 모든 사람이 존중받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보편적 권리 실현을 위해 국가 제도 안에서 인권 존중이 필요하다는 문제의식은 국가인권위원회 탄생으로 이어졌다. ‘모든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보호하고 그 수준을 향상시킴으로써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실현하고 민주적 기본질서 확립에 이바지함을 목적으로 한다.’ 국가인권위원회법 1조에 명시된 설립목적은 민주주의와 인권 실현을 위한 국가인권기구의 역할을 명확하게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설립 취지가 무색하게 요즘 국가인권위는 민주주의와 인권을 후퇴시키는 일에 앞장서고 있다. 계엄 선포로 국가를 혼란스럽게 한 내란 세력을 옹호하고 있기 때문이다.

2월10일, ‘계엄 선포로 야기된 국가의 위기 극복 대책 권고의 건’, 윤석열 대통령의 방어권 보장을 촉구하는 안건이 전원위에 상정될 예정이다. 이미 지난 1월13일, 안건 상정을 시도했다 시민들의 저항으로 저지된 바 있다. 이번엔 지난번 안건에서 비상 계엄이 고도의 통치행위이며 헌법재판소의 탄핵 심판 권한 자체를 부정하는 내용이 추가되었다. 민주주의를 혼란스럽게 하는 윤석열의 입, 극우 지지자들의 목소리에 힘을 실어주고 있는 셈이다.

인권위원 김용원은 내란 선동 세력을 옹호하고, ‘대통령 탄핵 시 헌재를 부숴야 한다’며 헌법재판소를 겨냥한 난폭한 언행을 이어가고 있다. 헌법을 수호하고 독립성을 유지해야 하는 인권위원의 역할과는 정반대의 행동이다. 이전에도 차별을 조장하거나 다른 인권위원과 직원들을 향한 인권침해 발언으로 문제가 되었다.

그러나 제재 당하기는커녕 갈수록 막말이 과격해지고 있는 상황이다. 이 외에도 각 국가 인권 기구들의 등급을 심사하는 세계국가인권기구연합에 국가인권위가 잘 운영되고 있다는 셀프 칭찬이 담긴 서한을 보낸 사실도 드러났다. 계엄과 내란 동조, 인권위원의 막말 언행으로 뜨겁게 논란이 되는 현실은 서한에 담기지 않았다. 지금 벌어지는 거침없는 행보를 보면 국가인권위, 인권위원이라는 명칭에 새겨진, ‘인권’이라는 말이 참으로 부끄러울 지경이다.

평온했던 밤 갑작스러운 계엄 선포로 일상은 무너지고 사회는 혼돈의 연속이다. 포고문에 담겼던 정치 행위 금지, 언론 출판의 자유 박탈, 기본권 통제 조항은 인권침해 그 자체였다. 계엄 선포 이후 닥친 사회·경제적 위기와 그로 인한 피해가 얼마나 지속될 지 알 수 없다. 국가 권력에 의해 안전한 일상이 일시에 무너질 수 있다는 시민들의 불안과 공포는 어떻게 측정할 수 있을까. 극단으로 치닫는 극우 정치와 혐오 선동은 앞날을 더욱 막막하게 한다.

계엄 선포만으로도 이렇게 민주주의와 인권은 걷잡을 수 없이 후퇴되고 있다. 국가인권위원회법 1조에 새겨진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실현하고 민주적 기본질서 확립에 이바지해야 한다’는 역할이 절실해지는 지금이다.

인권은 국가 권력과 정권을 옹호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다. 국가 권력이 제 역할을 하고 있는지 감시하고 비판하는, 저항하는 목소리여야 한다. 사회적 약자의 든든한 지지자이며 기댈 최후의 보루. 그것이 국가인권위가 해야 할 역할이다.

국가인권위가 지켜야 하는 것은 권력을 제멋대로 휘두른 윤석열과 내란 동조자 세력이 아니다. 시린 겨울, 인권과 민주주의를 위해 거리에 나선 시민들의 곁이라는 것, 그것이 국가인권위의 자리라는 것을 하루빨리 깨닫길 바란다.

/안은정 다산인권센터 상임활동가

<※외부인사의 글은 경인일보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