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서 극단적 발언, 설득력 의문

거친 언어에 거친 반발 서로 공전만

대통령 지지율 상승하는 이유도

野 안하무인에 반작용 부정 못해

정의 그 바탕은 상대 존중서 시작

김영호 성공회대 석좌교수
김영호 성공회대 석좌교수

2025년 새해를 맞이했지만, 한국은 여전히 정치적 블랙홀에 빨려 들어가 혼란과 갈등 속에 빠져있으며 국민의 피로감 역시 극에 달하고 있다.

지난 1월13일 국회에서 나온 발언 “몰랐다면 뇌가 없는 것이고, 아는데도 했다면 제정신이 아니다”, 그리고 1월17일 국가인권위원회 상임위원에게 “뇌가 썩었다”라는 극단적인 발언이 과연 누구에게 무슨 설득력을 갖게 하는지 의문이 든다. ‘논어’ 자로 편에 ‘군자 화이부동(君子 和而不同)’이라는 말이 있다. 조화를 이루지만 다 똑같지는 않다는 뜻이다. 다양한 의견을 존중하며 서로 조화를 이루라는 의미로 상기할 필요가 있다. 정치가 일방적일 수 없는 것은 당연하며 의견이 다른 부분에 대해 차선을 통해 타협점을 찾는 것이 정치의 백미(白眉) 아닌가.

그러나 현실에서는 거대 야당은 강한 힘을 내세워 상대를 무시하고, “뇌가 없다” 등의 거친 언어로 TV 화면을 장식하고, 이에 거친 반발이 이어지면서 정치권은 서로 공전할뿐이다.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보던 답답한 국민은 아마도 직접 정치의 현장에 뛰어들어 대규모 집회가 하루도 빠지지 않고 열리는 정치 실종의 나날들 아닌가.

이제 ‘국민의 삶’ 역시 실종되고 있기에, 이 정치가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지에 대한 의구심이 다시금 떠오른다. 서민 경제의 악화, 자영업의 몰락, 중산층의 붕괴에 대한 수많은 경고에도 불구하고, 정치권은 외면하는 듯하다. 월급은 오르지 않는데 급등한 주택(아파트)가격 그리고 고물가 속에서 막대한 이득은 누가 본 것인가. 침묵하는 정치권이 투기꾼의 배후 세력이 아니길 바란다. 가장 기본인 국민의 의식주 고통에는 외면하면서 오직 과격한 정치적 갈등조성과 편향 확정적 정치 선전(Propaganda)만이 난무하지 않기를 정말 바란다.

노자의 ‘도덕경’ 상선약수에서는 참된 지도력을 ‘다투지 않음’(不爭)에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원칙은 우리 사회에서 이미 사라진 지 오래된 듯하다. ‘부쟁의 원칙’은 상대방을 인정하는 데서 출발하지만, 지금 우리 사회는 과격한 길거리 선동과 극단적 대립만이 난무하고 있다. 이는 결국 상호 공멸한다는 것을 역사는 증명해왔다. 우리가 함께 살아남기 위해서는 오직 ‘부쟁의 원칙’을 실천하는 것이다.

영원한 정권은 없다. 한국 민주주의는 많은 고난을 이겨내며 성숙해 왔다. 일부 과격 세력을 등에 업고 움직이는 정치세력이 지금까지 이룩한 민주주의를 흔들 수 없다. 정권이 바뀌는 이유는 언제든지 그들의 잘못에 대해 냉혹한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이 우리 민주주의 역사의 교훈이다.

작년 연말 계엄 시도가 6시간만에 막을 내린 것도 우리의 민주주의가 이미 성숙하였기에 보여주는 결과이다. 아무리 길거리 정치가 난무하고, 거리마다 현수막이 공해처럼 걸려 있어도, 예기치 않았던 침묵하던 2030세대의 분노가 표출되고 있다는 사실을 정치권은 주목해야 한다. 혼란한 탄핵 정국에서 갑자기 여당과 대통령의 지지율이 상승하는 이유도 이들 2030세대의 생각과 무관하지 않다. 이는 여당이나 대통령의 성과 때문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야당의 안하무인격 태도에 대한 반작용이라는 점을 부정할 수 없다.

성서 미가서에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고, 인자(仁慈)를 사랑하며 겸손하라’라는 문구가 있다. 이는 ‘정의·사랑·겸손’이라는 세 가지 덕목의 중요성을 일깨운다. 정의는 공정한 제도를 통해 실현되며 그 바탕은 상대에 대한 즉 서로에 대한 존중에서 시작된다. 상대를 무시하고 교만해지면 결국 자기만의 동굴에 갇혀 진실을 외면하고 독재(獨裁)적 망상의 길을 걷게 될뿐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정치는 희망과 방향을 제시하는 정치다. 그것은 화합을 위한 ‘조화 정신’, ‘부쟁의 원칙’, 그리고 ‘정의·사랑·겸손’의 원칙을 바탕으로 해야 한다. 이 원칙이 2025년 무너진 한국 정치 지형을 바로 잡고 현재의 난국을 헤쳐나가는 지혜의 근본이 되기를 희망한다.

/김영호 성공회대 석좌교수

<※외부인사의 글은 경인일보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