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유지’ 틀을 바꿔야

 

30년전 가족해체 방지 입법 취지

회복 목적에 피해자 보호는 밀려

‘친밀관계’까지 적용확대 주장도

30년 가까이 시행중인 가정폭력처벌법을 피해자 보호 중심으로 전면 개정해야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경인일보DB
30년 가까이 시행중인 가정폭력처벌법을 피해자 보호 중심으로 전면 개정해야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경인일보DB

가정폭력이 살인으로 뻗어나가는 비극의 고리를 끊으려면 ‘가정유지’를 근간으로 30년 가까이 시행 중인 ‘가정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가정폭력처벌법)을 피해자 보호 중심으로 전면 개정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가정폭력처벌법은 지난 1997년 가정폭력이 심각한 사회문제로 떠오르자 사회와 국가가 적극 개입해 가정의 평화와 안정을 회복하자는 취지로 마련됐다. 이후 법 개정 등을 통해 크고 작은 변화가 있었지만 제정 당시 입법 목적이었던 가정유지의 골자는 바뀌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다.

가정폭력을 포함해 성범죄 사안을 다루는 전문가들은 이 법의 목적이 가정 유지·보호에 있다 보니 피해자 보호는 뒷전일 수밖에 없다고 지적한다. 가정해체란 최악의 상황을 막기 위해 형사처벌을 미루게 되고 가정보호사건 처리 등으로 회복을 도모하게 만들면서 결국 피해자에게 보복의 두려움을, 가해자에게는 ‘재범 기회’를 주기 때문이다.

안지희(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여성인권위원회) 변호사는 “가정폭력처벌법에서 ‘파괴된 가정의 평화와 안정’이란 목적 취지가 그대로 남아 있어 처벌규정이 생겨도 이에 맞춰 제한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이 조항부터 개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허민숙 국회입법조사처 입법조사연구관도 “경찰이 출동해 피해자에게 사건 접수 의사를 묻는 식의 관행과 ‘반의사불벌죄’가 가정폭력사건에 남은 것은 법이 가정유지를 목적으로 만들어졌고 이 조항이 여전히 남아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가정의 틀이 변모한 만큼 지금의 가정폭력처벌법 적용 대상을 ‘친밀한 관계(파트너)’로 넓혀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다. 가정 폭력이 과거처럼 법률혼 관계 등이 아닌 친밀 기반의 다양한 관계 속에서 발생하기 때문에 모든 폭력을 통제할 수 있는 구조가 갖춰져야 한다는 의견이다.

김효정 여성정책연구원 부연구위원은 “가정보호에 치중하는 게 아니라 피해자 개인 인권·자유를 보장하려면 사회적 변화에 따른 모든 상황을 포괄할 수 있는 처벌법이 마련돼야 한다”며 “그래야 배우자나 지인 등 누구나 피해자가 될 수 있고 살인이 반복되는 일을 막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신고 상황에서 물리적 폭행이 없더라도 ‘강압적 통제’ 개념을 도입, 가해자를 보다 분명히 분리할 수 있는 근거가 필요하다는 의견도 제시된다. 강압적 통제는 친밀 관계에서 피해자의 삶이 가해자에 의해 완전히 장악된 상태를 뜻한다.

허 조사관은 이 개념을 가정폭력 조사에 도입한 호주 사례를 언급하며 “호주에서 가정폭력 사망 피해자들 가운데 90% 이상이 강압적통제 상황에 놓여 있었다는 조사가 있다”며 “신체폭력 없이 그 어떤 것도 할 수 없는 상태야말로 극도의 위험 증거이기 때문에 이를 통해 위험군을 분류해야 한다”고 했다. 이어 “명확하게 가해자를 식별해 체포하는 미국, 영국 사례처럼 피해자 처벌 의사 없이도 가해자를 체포해 조사할 필요도 있다”고 덧붙였다.

김 연구위원은 “사건 하나가 순식간에 살인으로 이어지는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하는 게 가정폭력 사안인 만큼 추가 피해가 우려되는 피해자들에 대한 관리가 중요하다”며 “입학기 아동·청소년들의 생존 현황 등을 전수조사하는 것처럼 피해 위험도가 높은 가정에 대한 조사도 지속적으로 펼쳐 상황에 맞는 대응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가정폭력에 노출된 피해자들의 경제·심리적 취약성을 고려해 이들에게 현행 보호책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게 조치해야 한다는 제언도 있다.

안 변호사는 “가정폭력 피해자가 신고로 도리어 죄책감을 느끼는 경우가 많을 정도로 심리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반면에 스토킹피해 등 다른 성범죄 피해자들의 경우와 다르게 지원책은 적다”며 “현장 출동 경찰이 피해 상황을 나눌 수 있는 국선변호사나 가정폭력 상담소 등에 대한 안내절차를 진행할 수 있는 제도적 보완이 이뤄져야 한다”고 제안했다.

/조수현기자 joeloach@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