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권재 시장, 미8군 사령관 만나

매년 7월 기념·추도식 참석 요청

스미스 부대원들의 숭고한 죽음

1950년 7월5일 오산 죽미령 전투에서 희생된 유엔군 스미스 부대원을 기리기 위해 1955년 7월5일 살아남은 스미스부대원들이 쌓은 옛 유엔군초전기념비. 2025.2.16 오산/공지영기자 jyg@kyeongin.com
1950년 7월5일 오산 죽미령 전투에서 희생된 유엔군 스미스 부대원을 기리기 위해 1955년 7월5일 살아남은 스미스부대원들이 쌓은 옛 유엔군초전기념비. 2025.2.16 오산/공지영기자 jyg@kyeongin.com

“한국은 어디에 있는 나라입니까.”

오산 죽미령 평화공원은 1950년 7월5일, 6시간 15분 동안의 죽미령 전투를 기억하고 머나먼 이국땅에서 희생된 이름모를 미국의 젊은 군인들을 추모하는 곳이다.

죽미령 평화공원에는 작은 돌을 겹겹이 쌓아올린 아주 오래된 추모비가 있다. 옛 유엔군 초전기념비로, 오늘날 우리가 죽미령 평화공원을 찾고 기억해야 할 이유다.

1950년 6월25일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유엔(UN) 안전보장이사회 결의로 미국의 지상군은 한국에 파견된다. 찰스 스미스 중령이 이끄는 스미스 특수임무부대였다. 보병 406명과 포병 134명 등 총 540명으로 구성된 스미스 부대는 ‘경부 국도를 따라 북진하며 가능한 북쪽에서 적의 침공을 최대한 저지하라’란 명령을 받았고 평택·안성을 사수하기 위한 진지로 죽미령 고개를 택했다.

그리고 스미스 부대는 7월5일 죽미령 전투로 181명이 전사하거나 실종됐다. 대부분 열여덟에서 스무살 안팎의 청춘들이었다. 전쟁이 끝난 1955년 7월5일 살아남은 스미스 부대원들은 다시 죽미령을 찾았다. 평화를 위해 용감히 싸우다 숨진 전우를 기억하기 위해서다. 540개의 돌로 쌓아올린 기념비 아래에 이렇게 글을 새겨넣었다. ‘미합중국 군대와 공산침략군 간의 최초의 전투를 개시했음을 기념하기 위해 이 비를 세우노라’.

죽미령 전투는 패배한 전투다. 그러나 전차를 앞세운 5천여 명의 북한군을 상대로 540명 군인들이 희생으로 버티는 동안, 낙동강 방어선 구축 시간을 벌고 북한군의 전력을 파악해 전세를 뒤집을 수 있었다. 또 유엔군의 첫 전투인 죽미령 전투를 시작으로 미국을 비롯한 세계의 젊은이들이 참전한 것은 더 이상 무고한 이들의 희생을 막고 평화를 바랐기 때문이다. 매년 새로 부임한 미군이 가장 먼저 죽미령을 찾는 것도 그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서다. 이는 국가적 추모로 격상돼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권재 오산시장은 지난 12일 캠프 험프리스에서 미8군 사령관인 크리스토퍼 라니부 중장을 만나 매년 7월 초 열리는 죽미령 전투 기념식과 전몰장병 추도식에 참석해 함께 추모할 것을 요청했다. 이 시장은 “태극기와 성조기, 유엔기를 높이 걸어 전투가 갖는 평화와 동맹의 메시지를 알리고 국가가 기억해야 할 전투로 격상시키기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름도 위치도 들어본 적 없는 나라, 당신은 그 나라를 위해 목숨 바쳐 싸울 수 있습니까?” 스미스 부대의 이름을 딴 죽미령 스미스평화관에 적힌 물음이다. 우리는 어떻게 답할 것인가.

오산/공지영기자 jyg@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