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몽은 성찰하려는 지성의 작용
이를 다시 맹종할때 다시금 주술”
혐오정치·이재명 반대 주장 보단
먼저 내란 세력부터 배제시킨 뒤
‘권력, 국민으로부터’ 정상화 하자

주술에 빠진 자들이 계몽을 말한다. 헌정질서를 가장 문란하게 한 자가 헌정질서를 위해 내란을 시도했단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헛소리가 마침내 탄핵공작이라는 개소리로 이어진다. 이 사회 기득권 카르텔의 최정상에 있는 자들이 기득권 타파를 주장한다. 이렇게 말이 뒤틀리고 삶이 뒤집어지는 일이 마치 정상인 듯이 보이는 것은 이 세상이 맹목적 주술에 빠졌기 때문이다. 반국가 세력, 종북 세력 등의 말잔치는 주술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말들은 일말의 사실성에도 불구하고, 전혀 의미 없는 헛소리에 지나지 않는다. 그 까닭은 이 말이 있어야 할 올바른 자리를 완전히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내란을 기도한 자는 말할 것도 없지만, 대선을 염두에 둔 채 적극적으로 계엄 상황을 옹호하는 자들은 온갖 주술적 용어로 시민을 호도한다. 계엄 세력이 퇴출되면 자신이 지닌 한 줌의 권력과 부가 훼손될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기득권층은 물론, 평범한 사람을 주술로 몰아간다. 여기에 계엄을 ‘계몽령’이라는 수작에까지 이르니 이 사회의 말이 얼마나 더 무너질지 알 수 없을 지경이다.
위기가 깊을수록 구원 또한 가까울 것이다. 그러나 그 구원은 깨어있는 우리가 없이는 불가능하다. 독일 철학자 아도르노는 근대의 모순을 간단히 주술과 계몽의 관계로 설명한다. 미몽에 빠져 허덕이던 고대의 주술을 계몽정신으로 극복했던 근대라는 시대가 위기에 빠진 것은 그 계몽이 다시금 경직된 주술이 되었기 때문이다. 외부의 모호한 힘에 기대거나 욕망에 현혹되어 인간의 정신을 도구로 사용할 때 우리는 주술에 빠지게 된다. 계몽은 남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생각하고 성찰함으로써 사태의 진실을 이해하는 지성의 작용을 의미한다. 그에 반해 주술은 스스로의 생각 없이 주어진 것을 맹종하는 태도를 일컫는다. 계몽된 근대가 정치적 파시즘과 산업사회의 논리를 맹종할 때 다시금 주술이 되었다는 것이 아도르노의 비판이다. 파시즘으로 망가진 세계를 성찰하는 그의 대답이 ‘계몽의 변증법’에 담겨있다.
지금 이 변혁의 기회를 놓치면 우리 역시 회복할 수 없는 야만의 나락으로, 나치즘과 같은 광기의 나라로 떨어질 것이다. 그래서 내란 동조 세력이 말하는 그 거짓과 사악함을 깨부수고, 그들이 끊임없이 주입하는 주술을 벗어나야 한다. 혐오정치가 문제라고 말하는 주술은 현상을 원인으로 돌린다. 그래서 그들은 계엄 상황과 극우의 급진적 대두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이재명은 안된다’는 불안의 주술이나, 개헌과 양비론 등의 정치적 주술을 펼치고 있다. 무엇보다 먼저 내란 세력을 이 사회에서 철저히 배제시켜야 한다. 그들은 우리 사회가 필요로 하는 공동선과 공동체 정신을 외면하는 이익만능의 주술을 확산시킨다. 철저히 반사회적 존재다. 지금 누가 계엄 상황을 옹호하고 있는지 살펴보라. 불평등과 편 가르기를 통해 배제의 정치를 펼치는 이들, 법과 언론, 자본과 권력을 배타적으로 독점한 이들이 온갖 현란한 주술을 증폭시키고 있다.
내란을 옹호하는 세력이 독점하려는 개소리를 일상의 말로 되돌려야 한다. 헌법 1조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말을 정상으로 돌려야 한다. 헌법에 담긴 균등한 경제, 균등한 정치권력, 균등한 교육이라는 정신을 남김없이 일상화해야 한다. 이 말들이 결코 듣기 좋은 수사에 그쳐서는 안 된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는 힘들더라도 주술을 넘어 계몽 정신으로 걸어가야 한다. 생각하지 않으면 주술의 미몽에 허덕이게 된다. 주술은 뇌를 썩게 만든다. 주술 사회는 극우 파시즘의 토양이 된다. 계엄 상황의 야만을 현실정치의 이해관계로 희석시키려는 자들의 주술 언어를 넘어서야 한다.
계엄 상황을 옹호하는 자들은 그들이 지닌 기득권을 놓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휩싸여 있다. 그들은 지금 필요한 공동체적 개혁을 극도로 꺼려한다. 인간다운 삶을 살기 위해서는 절제를 토대로 한 계몽을 우리 스스로 만들어 가야 한다. 인간답게, 민주시민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어렵더라도 주술 언어를 넘어서는 계몽 정신을 일깨워야 한다. 이 야만의 주술에 맞선 새로운 계몽이 절실하다.
/신승환 가톨릭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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