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97세로 별세
인천적십자병원 시민 등 조문 행렬
쉼터 생활시절 매주 수요집회 참여
‘나비기금’ 제정… 피해자 7명 생존

“죽을 때까지 상처는 아물지 않습니다. 일본 정부가 양심이 있다면 이제라도 그 한을 풀어줘야 하지 않을까요.” -고(故) 길원옥 할머니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길원옥 할머니가 간절히 바랐던 일본 정부의 사과를 받지 못한 채 생을 마감했다.
17일 오전 11시께 고인의 빈소가 마련된 인천 연수구 인천적십자병원 장례식장에는 친인척, 시민들의 조문 행렬이 이어졌다. 빈소에는 또 다른 위안부 피해자 이용수(97) 할머니가 보낸 근조 화환이 놓여 있었다.
길 할머니는 전날 오후 인천 연수구 자택에서 향년 97세로 별세했다. 유가족들은 어두운 표정으로 빈소를 지켰다. 길 할머니 양아들 황선희 목사는 취재진에 “돌아가시기 전까지 건강이 좋지 않아 말씀하시는 것도 어려워하셨다”며 안타까워했다. 이어 “어머니가 건강하셨을 때 말씀하시던 (위안부 문제) 이야기들을 (기사 등에) 담아 달라”고 했다.
시민들도 빈소를 찾았다. 경기 부천에서 온 김모(46)씨는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기사를 접한 뒤 당연히 조문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며 “할머니께 마지막 인사를 드리고 싶었다”고 했다.
1928년 평안북도 회천에서 태어난 길 할머니는 평양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1940년 13세 때 ‘돈을 벌 수 있다는 말’에 속아 중국 만주 위안소에 끌려가 고초를 겪었다. 1년 뒤 병을 얻고 귀국한 길 할머니는 집안 살림을 돕기 위해 15세에 중국에 갔다가 다시 위안소에 동원됐다.

해방 이듬해인 1946년 인천항을 통해 돌아온 길 할머니는 고향으로 가기 위해 충남 천안 등지에서 돈을 벌었지만, 남북 분단으로 끝내 고향 땅을 밟지 못했다. 31세에 아들(황 목사)을 입양해 가정을 꾸린 길 할머니는 1998년 정부에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로 등록했다. 이후 피해 사실을 국내외에 알리는 활동을 이어왔다.
인천에 터를 잡은 길 할머니는 2004년부터 2020년까지 정의기억연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쉼터인 ‘평화의 우리집’으로 거처를 옮겨 옛 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린 수요집회에 매주 참여했다. 쉼터를 나온 뒤에는 아들 가족과 함께 인천에서 생활했다.
길 할머니는 2012년 위안부 피해자인 김복동(1926~2019) 할머니와 함께 일본 정부로부터 배상을 받으면 세계 전쟁 피해 여성을 돕는 데 쓰겠다며 정의기억연대와 함께 ‘나비기금’을 제정했다. 2014년엔 스위스 제네바 유엔 인권이사회 의장실을 찾아가 위안부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전 세계 시민 150만여명의 서명을 건네기도 했다.

길 할머니가 세상을 떠나면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 생존자는 7명만 남았다. 정부에 등록된 피해자 240명 중 이미 233명이 사망했다. 생존자들 평균 연령은 95.7세다.
/백효은기자 100@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