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97세로 별세

 

인천적십자병원 시민 등 조문 행렬

쉼터 생활시절 매주 수요집회 참여

‘나비기금’ 제정… 피해자 7명 생존

17일 오전 인천 부평공원 ‘평화의 소녀상’ 앞을 시민들이 지나고 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인 길원옥 할머니가 지난 16일 오후 향년 97세 일기로 별세해 일본군 위안부 피해 생존자는 7명으로 줄었다. 2025.2.17 /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
17일 오전 인천 부평공원 ‘평화의 소녀상’ 앞을 시민들이 지나고 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인 길원옥 할머니가 지난 16일 오후 향년 97세 일기로 별세해 일본군 위안부 피해 생존자는 7명으로 줄었다. 2025.2.17 /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

“죽을 때까지 상처는 아물지 않습니다. 일본 정부가 양심이 있다면 이제라도 그 한을 풀어줘야 하지 않을까요.” -고(故) 길원옥 할머니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길원옥 할머니가 간절히 바랐던 일본 정부의 사과를 받지 못한 채 생을 마감했다.

17일 오전 11시께 고인의 빈소가 마련된 인천 연수구 인천적십자병원 장례식장에는 친인척, 시민들의 조문 행렬이 이어졌다. 빈소에는 또 다른 위안부 피해자 이용수(97) 할머니가 보낸 근조 화환이 놓여 있었다.

길 할머니는 전날 오후 인천 연수구 자택에서 향년 97세로 별세했다. 유가족들은 어두운 표정으로 빈소를 지켰다. 길 할머니 양아들 황선희 목사는 취재진에 “돌아가시기 전까지 건강이 좋지 않아 말씀하시는 것도 어려워하셨다”며 안타까워했다. 이어 “어머니가 건강하셨을 때 말씀하시던 (위안부 문제) 이야기들을 (기사 등에) 담아 달라”고 했다.

시민들도 빈소를 찾았다. 경기 부천에서 온 김모(46)씨는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기사를 접한 뒤 당연히 조문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며 “할머니께 마지막 인사를 드리고 싶었다”고 했다.

1928년 평안북도 회천에서 태어난 길 할머니는 평양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1940년 13세 때 ‘돈을 벌 수 있다는 말’에 속아 중국 만주 위안소에 끌려가 고초를 겪었다. 1년 뒤 병을 얻고 귀국한 길 할머니는 집안 살림을 돕기 위해 15세에 중국에 갔다가 다시 위안소에 동원됐다.

16일 향년 97세로 별세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길원옥 할머니. 2025.2.17 /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
16일 향년 97세로 별세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길원옥 할머니. 2025.2.17 /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

해방 이듬해인 1946년 인천항을 통해 돌아온 길 할머니는 고향으로 가기 위해 충남 천안 등지에서 돈을 벌었지만, 남북 분단으로 끝내 고향 땅을 밟지 못했다. 31세에 아들(황 목사)을 입양해 가정을 꾸린 길 할머니는 1998년 정부에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로 등록했다. 이후 피해 사실을 국내외에 알리는 활동을 이어왔다.

인천에 터를 잡은 길 할머니는 2004년부터 2020년까지 정의기억연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쉼터인 ‘평화의 우리집’으로 거처를 옮겨 옛 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린 수요집회에 매주 참여했다. 쉼터를 나온 뒤에는 아들 가족과 함께 인천에서 생활했다.

길 할머니는 2012년 위안부 피해자인 김복동(1926~2019) 할머니와 함께 일본 정부로부터 배상을 받으면 세계 전쟁 피해 여성을 돕는 데 쓰겠다며 정의기억연대와 함께 ‘나비기금’을 제정했다. 2014년엔 스위스 제네바 유엔 인권이사회 의장실을 찾아가 위안부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전 세계 시민 150만여명의 서명을 건네기도 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길원옥 할머니가 생전 또 다른 위안부 피해자인 고(故) 김복동 할머니의 빈소를 찾은 모습. /연합뉴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길원옥 할머니가 생전 또 다른 위안부 피해자인 고(故) 김복동 할머니의 빈소를 찾은 모습. /연합뉴스

길 할머니가 세상을 떠나면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 생존자는 7명만 남았다. 정부에 등록된 피해자 240명 중 이미 233명이 사망했다. 생존자들 평균 연령은 95.7세다.

/백효은기자 100@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