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만행 알리고 인권운동 앞장 위대한 삶”… 생존자 이제 7명뿐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고(故) 길원옥 할머니 발인일인 18일 오전 인천시 연수구 인천적십자병원 장례식장에서 또 다른 위안부 피해자 이용수 할머니가 손을 흔들며 오랜 벗의 마지막을 배웅하고 있다. 2025.2.18 /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고(故) 길원옥 할머니 발인일인 18일 오전 인천시 연수구 인천적십자병원 장례식장에서 또 다른 위안부 피해자 이용수 할머니가 손을 흔들며 오랜 벗의 마지막을 배웅하고 있다. 2025.2.18 /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

“원옥아 잘 가. 그동안 큰일 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이용수(97) 할머니가 일본 정부의 사과와 배상을 받기 위해 함께 힘쓴 벗, 고(故) 길원옥 할머니에게 이렇게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길 할머니는 18일 가족과 시민들의 배웅을 받으며 영면에 들었다.

이날 오전 9시30분께 인천 연수구 인천적십자병원 장례식장에서 길 할머니의 발인식이 거행됐다. 길 할머니는 지난 16일 인천 연수구 자택에서 향년 97세로 생을 마감했다. (2월18일자 1면 보도)

끝끝내 아물지못한 故 길원옥 할머니의 한… 남은 우리가 풀어가리

끝끝내 아물지못한 故 길원옥 할머니의 한… 남은 우리가 풀어가리

위안부 피해자 길원옥 할머니가 간절히 바랐던 일본 정부의 사과를 받지 못한 채 생을 마감했다. 17일 오전 11시께 고인의 빈소가 마련된 인천 연수구 인천적십자병원 장례식장에는 친인척, 시민들의 조문 행렬이 이어졌다. 빈소에는 또 다른 위안부 피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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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례예식에서 정석원 송도감리교회 목사는 “고인은 생전 위안부 피해자이자 인권운동가로 두 가지 모습을 보이셨다”며 “이북 한 시골에서 태어나 위안부로 끌려간 것 외에는 남들과 다를 것이 없는 분이셨다”고 했다.

그러면서 “자신의 삶을 온전히 드러내고 자신과 같은 상황에 직면한 사람들을 위해 (위안부 같은) 이런 만행이 더 이상 발생하지 않도록 인권운동가로서 활동하셨다”면서 “위대한 삶을 사신 분”이라고 했다.

18일 오전 인천 연수구 인천적십자병원 장례식장에서 열린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故길원옥 할머니의 발인식에서 이용수(97) 할머니가 인사를 건네고 있다. 2025.2.18/백효은기자100@kyeongin.com
18일 오전 인천 연수구 인천적십자병원 장례식장에서 열린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故길원옥 할머니의 발인식에서 이용수(97) 할머니가 인사를 건네고 있다. 2025.2.18/백효은기자100@kyeongin.com

이용수 할머니도 발인식에 참석해 길 할머니의 마지막을 지켜봤다. 운구차에 실린 길 할머니의 시신이 안치된 관을 어루만지던 이 할머니는 “원옥아 잘 가. 이제 아픈 데 없이 잘 가라”며 울먹였다.

길 할머니는 1998년 정부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로 등록된 뒤 일제의 만행을 국내외에 알리는 활동을 해왔다. 2004년부터 2020년까지 정의기억연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쉼터 ‘평화의 우리집’에 머물던 길 할머니는 옛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린 수요집회에 매주 참여했다. 쉼터를 나온 뒤에는 아들 가족과 함께 인천에서 지냈다.

길 할머니는 2012년 위안부 피해자인 김복동(1926~2019) 할머니와 함께 “일본 정부로부터 배상을 받으면 세계 전쟁 피해 여성을 돕는 데 쓰겠다”며 ‘나비기금’을 만들었고, 2014년엔 유엔 인권이사회에 위안부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서명부를 전달했다.

길 할머니가 세상을 떠나면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 생존자는 7명만 남았다.

전날 길 할머니 빈소를 찾은 우원식 국회 의장은 “일본 정부의 사과, 정당한 배상을 받지 못한 채 돌아가셔서 후손으로서 착잡하다”며 “생전 위안부 피해를 알리기 위해 많은 활동을 하셨는데 그 뜻이 훼손되지 않도록 뒷받침해 나가겠다”고 했다.

/백효은기자 100@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