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문 속 일제강점기 시절 이야기

‘현재와 유사’ 정신없이 빠져들어

1930년대 이애리수라는 가수 예시

서부지법 폭동 드라마 ‘지옥’ 데자뷔

역사 속 사실 수학공식처럼 반복돼

김서령 소설가
김서령 소설가

꽤 비싼 값을 치르고 대만 우롱차를 샀다. 비싼 차를 샀으니 다기도 고운 것으로 골라야지. 차판 위에 자사호와 공도배, 찻잔을 늘어놓았지만 나는 전기 주전자에서 펄펄 끓는 물을 연신 부어가며 품위도 없이 벌컥벌컥 차를 들이켰다. 책을 읽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상하고 우아한 독서 풍경을 자랑하고 싶지만 실상은 영 아니다. 나는 테이블에 고개를 처박고선 뜨거운 차를 경박하게 후후 소리 내어 불며 책장을 파고들었다. “뭘 읽기에 그래?” 내 꼴을 바라보던 친구가 급기야 책표지를 들추었다. ‘일제강점기 경성 지역 여학생의 운동과 생활’이다. 그제야 옆에 놓인 책은 ‘일제강점기 경성부민의 여가 생활’이라는 걸 깨달은 친구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게 다 뭐야? 이게 재밌어?” 나는 풀풀 웃었다. “공부하느라고.” 나는 장편소설 집필을 앞두고 공부 중이었다.

논문 속 일제강점기 시절 이야기에 나는 정신없이 빠져들었다. 그저 그런 100년 전 이야기라면 내가 그렇게 빠져들 리 없다. 신기하게도 그 시절 이야기는 지금과 똑 닮았다. 예를 하나 들어볼까? 1930년대 이애리수라는 가수가 있었다. 서양 이름 앨리스(Alice)을 음차해 애리수라는 이름을 가졌던 이 가수는 우리 귀에도 낯익은 ‘황성옛터’를 부른 가수다. 그야말로 인기 절정을 누렸던 그는 안타깝게도 유부남과 사랑에 빠져 각종 신문의 가십 기사에 숱하게 오르내렸다. 그때도 연예인의 뒤를 캐 별의별 스캔들 기사를 써대는 기자들이 있었다. 이애리수는 애인과 함께 동반자살을 기도하는데 천만다행으로 살아났으나 그야말로 가십의 폭격을 받았다. 천하의 잡것 취급과 더불어 세간의 관심을 그런 식으로 끌려고 한다는 비난, 즉 ‘관종’ 취급이 시작된 것이었다. 이애리수는 결국 가요계에 복귀하지 못하고 평생 숨어 살았다. 훗날 그가 낳은 자식들조차 어머니가 가수였다는 걸 몰랐다고 하니, 수많은 조선 백성을 울렸던 ‘황성옛터’의 가수도 피해갈 수 없었던 대중의 공격이었다. 며칠 전 한 젊은 배우의 사망 뉴스를 보며 마음이 덜걱거렸다. 20대 초반이라면 얼마나 엉성한 나이인가. 나는 나의 20대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아이고, 아이고 소리가 절로 나올 만큼 부끄럽다. 이상한 허세, 이상한 치기로 가득했던 시기였다. 다행히 시간은 나를 조금은 그럴듯한 어른으로 만들어주었다. 사망한 그 배우도 그랬을 텐데. 뭘 그렇게까지 우리는 그를 몰아붙였을까. 다시 나타나기만 해 봐, 가만두지 않을 거야, 마치 그런 심보라도 되는 양 말이다.

이애리수는 실제 인물이었지만 꼭 실제 인물, 실제 사건이 아니라도 데자뷔를 느낄 때가 종종 있다. 얼마 전 서부지법 폭동이 일어나던 날이 딱 그랬다. 뉴스 화면에서 폭동 현장을 보며 ‘이게 어디서 많이 본 장면인데…’ 싶었다. 곧 떠올랐다. 넷플릭스 드라마 ‘지옥’이었다. 인간의 논리로는 설명할 수 없는 괴사건이 일어나는 시대, 사람들은 아무것도 믿을 수 없어 사이비 종교가 판을 치고, 또 그 힘을 등에 업고 얼토당토않은 세력을 꾸려 사회를 장악하는 ‘화살촉’ 무리가 생겨난다. 그들은 가차없다. 사이버 레커의 선동 하에 극단주의적 성향의 폭력배 무리가 된 것이다. 나는 그 드라마를 보며 마음이 몹시 불편했는데, 그건 아마도 화살촉이 비단 드라마 속 설정이 아닌 내가 지금 사는 시대에도 이미 있을 법한 조직이라는 생각 때문이었을 것이다. 실제로 화살촉은 서부지법에 나타났다. 화살촉은 드라마 속 이야기지만 서부지법 폭동 무리는 앞으로 또 100년 후 다른 모습으로 우리 앞에 나설 것이다. 이애리수가 100년 후 어느 배우의 모습으로 우리 앞에 나타났듯 말이다.

역사 속 사실은 때로 수학 공식 같다. 놀랍게도 페이지가 반복된다. 소설 핑계를 대고 내가 읽은 100여 편 논문 속 이야기들은 앞으로도 내 삶 앞에 속속들이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어처구니없지만 우리는 같은 실수를 또 반복하겠지. “아, 정말 학교에선 왜 역사를 제일 중요한 과목으로 놓지 않는 거야?” 나는 우롱차를 우아하게 우리고 있는 친구에게 공연히 짜증을 냈다. “응응, 알겠어….” 친구는 건성으로 대답하며 나에게 새로 우린 차 한 잔을 내밀었다.

/김서령 소설가

<※외부인사의 글은 경인일보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