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 형식 차용한 ‘닐 암스트롱…’
‘만들어진 간첩’ 피해자 인터뷰
한 사람 의해 자행된게 아니기에
“국가란” 손녀 질문 대답 어려워
시간 못 되돌려도 책임은 다해야

연극 ‘닐 암스트롱이 달에 갔을 때’(이보람 작, 마두영 연출, 2월21일~3월2일, 대학로예술극장 소극장)는 산 죽음에 관한 보고서이다. 간첩조작사건 피해자의 목소리를 무대화한 이 작품은 살아도 사는 게 아닌 삶에 관한 증언이자 기록이다.
연극 ‘닐 암스트롱이 달에 갔을 때’는 3막으로 된 작품이다. 제1막의 시간은 2002년이다. 네 명의 간첩조작사건 피해자가 등장한다. 피해 당사자의 목소리를 무대화하는 장치는 다큐멘터리 형식의 차용이다. 다큐멘터리 제작을 위한 인터뷰라는 설정이다. 인물은 카메라 앞에서 피해 당사자로서의 목소리를 들려준다. 객석 중앙에 놓인 카메라를 보며 인터뷰를 진행하는 동안 관객은 카메라 시점으로 무대를 응시하게 된다. 그렇게 간첩조작사건 피해 당사자의 목소리를 관객에게 전달하는 형식이다.
그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만들어진 간첩의 탄생과정을 상상해 본다. 폭행이 있었다. 협박이 있었다. 고문이 있었다. 그 전에 구금이 있었다. 그 전에 연행이 있었다. 그 전에 체포가 있었다. 그에 앞서 조작이 있었다. 그에 앞서 기획이 있었다. 그렇게 허위정보조작으로 간첩조작사건이 만들어지게 된다. 간첩이 만들어진 것이다. 이렇게 요약하는 것은 지나치게 추상적이라서 아무것도 말하지 않은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과연 그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고문을 한다. 원하는 대답이 나오지 않으면 폭행을 가한다. 이 과정을 반복한다. 더 버티면 협박을 시작한다. 가족에 대한 협박 앞에서 무너진다. 계속 버티면 회유책을 쓴다. 여기서 견뎌 봐야 몸만 상하니 재판정에서 마음껏 말하라고 부추긴다. 굴복한다. 자술서에 지장을 찍는다. 검찰 조사 과정에서 협박과 고문에 의해 어쩔 수 없이 한 것이지 진실이 아니라고 항변한다. 여기서 부인하면 처음부터 다시 조사를 받아야 한다고 말한다. 다시 굴복한다. 그 지옥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 그렇게 간첩은 만들어졌다.
제2막의 시간은 2012년이다. 10년의 세월이 지났다. 그 사이 세상을 떠난 피해자도 있다. 재심 청구는 기각된다. 누명을 벗을 길이 없다. “사는 게 아니라 버티는 거예요.” 살아도 사는 게 아닌 산 죽음의 시간이다. 피해자 중 한 명인 영국이 그래도 그 산 죽음의 시간을 버티는 까닭은 미리 떠난 아들에 대한 죄책감 때문이다. 무죄 판결문을 아들 무덤에 올리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10년 전 인터뷰에 담지 못한 말을 이어간다. 말해도 다 말하지 못하는 말들이 있기 마련이다. 인터뷰가 계속되는 이유이다.
제3막의 시간은 2022년이다. 다시 10년의 세월이 지났다. 이야기는 두 개로 전개된다. 하나는 영국의 이야기이다. 그 사이 영국은 요양원에 있다. 치매가 심하다. 그래도 무죄 판결문을 읽어줄 때면 표정이 편안해진다. 다른 하나는 호경의 이야기이다. 호경은 재일동포 유학생 간첩조작사건 피해자의 손녀이다. 할아버지의 시간을 찾아 한국에 온 것이다. “할아버지한테 국가는 뭐였을까요?” “왜 증명이 피해자의 몫입니까?” 전시관을 둘러보며 남긴 호경의 질문에 우리는 답해야 한다. 호경은 할아버지와 함께했던 활동가를 인터뷰하기로 한다. 그렇게 인터뷰는 이어진다.
국가란 무엇인가.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도 이 물음이 절실한 시기가 아닌가. 국가폭력에 의해 조작된 간첩, 만들어진 간첩으로 살아야 했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더욱 절절하게 다가오는 까닭은 국가란 무엇인가에 대한 물음에 우리가 온전히 답하고 있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들어진 간첩은 어느 한 사람에 의해 자행된 게 아니다. 만들어진 간첩은 어느 한 시기에만 있었던 일이 아니다. 민주화 이후에도, 최근까지도 반복되었다. 그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을지라도 그 책임은 다해야 하는 것 아닌가. 우리가 어떤 국가에 살기를 원하는가에 대해 답하려면 말이다.
왜 제목이 ‘닐 암스트롱이 달에 갔을 때’일까. 연극의 마지막 장면에 이르면 제목을 그렇게 붙인 의도를 헤아릴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려면 우선 극장에 가야 한다.
/권순대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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