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윤리학 업적 남긴 프랭크퍼트

강제된 악행도 도덕적 책임은 중요

내란사태 둘러싼 한국 사회 난장판

개소리는 거짓말과는 전혀 다르게

진실이 밝혀져도 계속돼 훨씬 위험

전호근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전호근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최근 한국 사회에서 갑자기 유명해진 미국의 철학자가 있다. 바로 메타윤리학 분야에서 주목할 만한 업적을 남긴 해리 프랭크퍼트 프린스턴 대학교 명예교수다. 일찍이 그는 악행에 대한 강제나 처벌과 상관없이 개인의 도덕적 책임은 여전히 중요하다는 통찰을 제시한 바 있다. 우리는 흔히 어떤 사람이 범죄를 저질렀다 하더라도 그것이 누군가에 의해 강제된 상황이라면 범죄를 저지른 자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주장을 상식처럼 받아들인다. 하지만 프랭크퍼트에 따르면 설사 강제된 상황이었다 하더라도 당사자가 달리 행동할 여지를 생각하지 않고 기꺼이 악행을 저질렀다면 도덕적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이를테면 권선징악이 덕목으로 강조되는 사회에서 어떤 사람이 선행에 따른 사회적 보상을 염두에 두지 않고 기꺼이 선을 행했을 때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도덕적 평가가 더 높아지는 것처럼, 악행 또한 비록 외부의 강제가 있다 하더라도 그와 상관없이 기꺼이 저지른다면 그에 따른 책임을 더 무겁게 져야 한다. 예컨대 나치의 아이히만은 총통의 명령에 따라 유대인을 학살할 수밖에 없었고 자신 또한 희생자일뿐이라고 주장했지만, 동일한 상황에서 달리 행동한 오스카 쉰들러 같은 이들이 있었기 때문에 강제된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명령을 따랐을 뿐이라는 아이히만의 주장은 타당성을 잃게 된다. 이처럼 프랭크퍼트의 관점은 아이히만 같은 반인륜적 거악을 처벌할 수 있는 근거를 세웠다는 점에서 메타윤리학의 빈자리를 메꿨다고 평가할 만하다.

하지만 한국 사회에서 프랭크퍼트가 주목받게 된 이유는 위에 기술한 그의 윤리학적 업적 때문이 아니라 지면에 쓰기에도 민망한 ‘개소리’에 대한 그의 통찰이 시의적절하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그는 ‘개소리에 대하여(원제:On Bullshit, 이윤 옮김, 필로소픽)’라는 책에서 개소리(bullshit)는 거짓말(lie)과 마찬가지로 진실이 아니지만, 거짓말과는 다르며 또 그보다 훨씬 위험한 진술이라고 규정한다.

그에 따르면 거짓을 말하는 사람과 진실을 말하는 사람은 모두 진실에 관심이 있다는 점에서만은 다르지 않다. 비록 거짓을 말하는 자라 할지라도 그는 진실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고 있으며 우리로 하여금 자신이 허위로 진술하는 어떤 것을 진실이라고 믿기를 바라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진실을 모른다면 진실과 다르게 말하는 것도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거짓은 진실의 반대이긴 하지만 진실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행위 중의 하나이다.

진실을 말하거나 거짓을 말하는 데 관심을 가진다는 것은 사물을 잘못 이해하는 것과 올바로 이해하는 것 사이에 차이가 있다고 인정하는 것이며, 적어도 그 차이를 구별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고 프랭크퍼트는 이야기한다. 결국 진실을 말하는 자와 거짓을 말하는 자는 같은 게임 속에서 반대편으로 움직일뿐 각자 자신들이 이해하는 진실에 반응한다는 점에서는 같다.

하지만 개소리는 이와 전혀 다르다. 개소리를 하는 자는 애초에 진실에 관심이 없다. 그 때문에 진실이 밝혀지면 힘을 잃는 거짓말과 달리 개소리는 진실이 밝혀진 뒤에도 계속된다. 개소리가 거짓말보다 위험한 이유다.

프랭크퍼트는 이 책의 앞머리에서 미국 사회에 개소리가 너무도 만연해 있다고 비판하고 있지만, 최근 내란사태를 둘러싸고 들려오는 개소리를 듣고 있자면 오히려 한국 사회야말로 개소리가 만연해 있는 난장판이 아닌가 싶다. 계엄령이 아닌 계몽령이라느니, 계엄령을 내렸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느니, 끌어내라는 대상은 의원이 아니라 요원이었다느니, 계엄군이 오히려 국민에게 폭행당했다느니 하는 식의 지껄임은 거짓말 축에도 끼지 못하는 개소리다.

프랭크퍼트가 지적하지 않았지만 개소리의 가장 큰 위험성은 그것이 대화와 토론을 불가능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개소리는 듣는 상대로 하여금 대화를 포기하게 만든다. 개소리를 개소리라고 말하는 순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 수밖에 없지 않은가!

/전호근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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