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 혼신 노력’ 다시 살펴야할 정신적 자산
친구 장준하 의문사 목회자서 재야운동 계기
사상, 행동·실천 이어지고 틈틈이 작품창작도
중심 잡아줄 어른 없어… 그를 떠올리는 까닭

세월이 가면 무엇이든 잊혀지게 마련이지만, 잊을 수도 없고 잊혀져서는 안 될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기록과 추모가 있다. 기록과 추모야말로 잊을 수 없는 것을 잊지 않고, 세월과 망각에도 견딜 수 있는 방법일 것이다. 그런데 기록과 추모 없이도 생생한 기억으로 소환되는 경우가 있다. 사회가 어지럽거나 어려울 때, 또는 정치 지도자들이 턱도 없이 못 미칠 때 과거에 위대한 업적을 쌓았거나 높은 인품과 도덕성을 보여준 인물들을 떠올리게 된다. 늦봄 문익환(1918~1994)을 다시 떠올리게 되는 것은 지금이 바로 그러한 때이기 때문이다.
늦봄은 언제나 기억되고 추모를 받아야 할 인물이지만 분단의 고착화를 넘어 우리가 분단 체제에 전혀 불편함을 느끼지 못한 채 완전히 적응하게 되고, 심지어 통일을 부정하고 이제 각자 따로 살자는 주장이 강한 설득력을 갖게 된 지금에 와서 늦봄의 혼신을 다한 통일의 노력은 다시 살펴봐야 할 정신적 자산이라 할 수 있다. 더군다나 늦봄과 달리 목회자들이 품격을 잃고 사회분열을 조장하거나 이를 틈타 권모술수를 부리며 사익을 챙기는 자들이 횡행하고, 국가를 보위해야 할 대통령이 나라를 혼란에 빠뜨리고 사회가 심각한 분열상을 보이는 지금 늦봄이 얼마나 훌륭한 사회적 어른이었는지 깨닫게 된다.
알다시피 늦봄은 목회자이자 교육자(교수)이며 통일운동가요 시인이었다. 사람을 알고자 하면 그 사람이 함께 종유(從遊)했던 주변 인물들을 보면 된다고 했거니와 그에게 큰 영향을 준 인물들은 부친 문재린 목사, 민중신학의 주창자인 스승 김재준 목사, 대학 동기였던 ‘사상계’ 편집인 장준하, 그리고 고향 친구인 시인 윤동주 등을 꼽을 수 있다.
평범한 목회자였던 늦봄이 재야운동의 전면에 나서게 된 것은 친구 장준하의 의문사 때문이었다. 1976년 3월1일 명동성당에서 손수 쓰고 발표한 ‘3·1 민주구국선언’ 직후부터 그는 영어의 몸이 됐다. 56세부터 77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18년 동안 무려 6차례 투옥됐다.
서슬퍼런 권력 앞에서도 굴복하지 않았으며 통일운동의 물꼬를 트기 위해 1989년 3월25일 전격적인 방북을 단행, ‘조평통’과 함께 ‘4·2선언’을 발표하기도 했다. 그의 통일 의지와 사상은 말에서 그친 것이 아니라 행동과 실천 그리고 작품 창작으로 이어졌다. ‘45년이라니’, ‘통일꾼의 노래’, ‘잠꼬대 아닌 잠꼬대’ 등 바쁜 와중에도 틈틈이 써내려간 여러 시편들이 그렇다.
우리는 물론 세계 도처에서 함량 미달의 정치 지도자들로 인해 고통을 받고 있다. 게다가 우리는 지금 불법적 계엄령 선포와 탄핵심판과 팽팽한 진영대결로 심각한 국가 분열 상태에 빠져 있다. 이는 정치적 신념의 차이 때문이기도 하지만, 사회적 갈등을 조율하고 중심을 잡아 줄 사회적 어른의 부재가 사태를 더 키우고 진정시키지 못하는 측면도 있다.
예전에는 성철 스님, 김수환 추기경, 대산 김대거 종사, 함석헌 선생, 지학순 주교 등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어른들이 많이 있었으나 현재는 사회적으로 존경받고 방할(棒喝)을 내려줄 사회적 어른이 드물거나 없다.
이럴 때 기독교 성직자로서 세상을 향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친, 나아가 불의한 권력과 사회에 대해 거침없이 비판의 목소리를 냈던 영혼의 소금 늦봄이 그립다. 특히 국가를 이끌어야 할 공당(公黨)들이 국민적 기대에 한참 못 미친 채 국민의힘은 그럭저럭 보수당이요, 더불어민주당도 상대의 색깔론 시비로 인해 진보정당처럼 보이는 수혜(?)를 누리는 가까스로 진보란 지적이 나오고 있다.
사회의 중심을 잡아 줄 어른도 없고 정당들도 국민적 기대에 미치지 못하고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지 못하는 지금, 이것이 확실한 자기철학을 가지고 양심을 저버리지 않았던 재야의 어른 늦봄을 떠올리는 까닭이요, 우리들의 기억이 그를 떠나보내지 못하는 이유다.
/조성면 객원논설위원·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