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을 사는 기준은 튼튼한가·편한가
작업복 ‘워크웨어’ 검색어로 사용
해외 빈티지숍 재킷 하나에 30만원
일부러 닳고 해지고 기름때 만들어
노동에 대해 갖는 이중적 인식 민망


옷은 주로 온라인으로 사는 편이다. 아무래도 직접 입어보고 살 수 없기 때문에 실패할 위험성이 높지만 판매상들이 가게 세를 내고 좌판을 벌이지 않으니 조금이라도 싸지 않겠나 하는 경제성의 원리를 궁리하는 것이다. 온라인으로 옷을 살 때 실패할 확률을 줄이려면 의류회사에서 써 놓은 용어들을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어야 직접 보지 않고도 옷감의 두께나 강도, 촉감 등을 짐작할 수 있다. 모든 용어를 두루 알 필요는 없고 자신이 선호하는 종류의 옷이나 옷감을 설명할 때 많이 쓰이는 용어들을 알아두면 도움이 된다.
내가 사는 옷의 기준은 기본적으로 두 가지를 중요하게 생각하는데, 튼튼한가(캔버스 원단, 헤비 코튼)와 편한가(와이드 핏, 루즈 핏)이다. 창고에서 상자를 나르는 일을 주로 하다 보니 옷이 상자나 롤테이너에 마찰하는 일이 많고 하루에 이만 보씩은 걸어야 하니 아무래도 옷감이 튼튼하고 쉽게 해지지 않아야 한다. 상자를 들거나 내릴 때를 생각하면 핏을 살리기 위해 타이트하게 디자인된 옷은 아무래도 피하게 된다. 통이 넉넉하고 편한 옷, 그러면서도 튼튼하고 잘 해지지 않는 옷, 그런 옷들을 계속 검색하다 보니 결국 인터넷 쇼핑 알고리즘이 내게 추천해주는 옷들은 대부분 ‘워크웨어’였다.
사실 작업복이라는 말인데 워크웨어라고 이름 붙여놓으니 뭔가 더 고급스럽게 느껴지는 것도 같다. 영어로 써놓으면 더 고급스럽거나 멋있어 보이는 것을 예전엔 그저 문화 사대주의 정도로 생각했으나 다른 한편으론 그저 민망한 말을 적나라하게 드러내지 않고 조금 해상도를 낮추는데 외국어가 쓰이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속옷을 언더웨어도 아니고 이너웨어라고 부르는 것처럼. 어쩌면 작업복이나 노동이라는 말도 무의식적으로 민망하게 생각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어찌 되었건 검색어로 사용할 기준이 되는 단어를 찾아내면 그 다음부터는 시간이 크게 절약된다. 워크웨어라고 검색을 하니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의 옷들이 좌르르 나타난다. 그중에 자주 등장하는 브랜드의 옷이 있는데 미국의 디트로이트의 건설 노동자들이 즐겨 입던 옷을 만들다가 성장한 회사라고 한다. 그 브랜드의 옷들을 검색하다 보니 미국이나 남미에서 노동자들이 입던 옷들을 파는 빈티지숍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튼튼하고 믿음직해 보이는 중고 작업복을 싼값에 구매해보려는 욕심에 들어갔으나 봄·가을에 입는 재킷 하나에 30만원대가 기본이었다. 국내 패션브랜드의 새 옷만큼이나 비싼 가격이었다. 남이 입던 낡은 옷을 잘 빨아다가 파는 것이야 물자 절약이나 환경보호 면에서도 나무랄 데 없는 일이지만 외국 노동자들이 입다가 내다 판 낡은 옷들이 노동자들이 엄두도 못 낼 가격에 팔린다는 것이 아이러니하고 우스운 일이다.
게다가 그런 노동의 흔적을 일부러 만들어 입기도 한다는 것이다. 닳아서 해진 것처럼 만드는 것은 샌드 워싱, 기름때가 찌든 것처럼 보이는 것은 오일 워싱이라고 한다. 옷이 해지고 기름때가 찌든 것이 멋있게 보인다면 그만큼 노동의 가치나 노동자에 대한 처우 또한 올라가면 좋을 텐데 현실이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할렘가의 불우한 삶 속에서 산 적은 없지만 힙합의 억눌린 목소리는 가지고 싶어서 삐뚜름한 모자에 금목걸이를 주렁주렁 걸고 방향 없는 분노를 표출하는 래퍼처럼, 권력과 자본에 길들여지지 않으려고 저항하는 록 스피릿은 오간데 없이 긴 머리와 가죽재킷, 성깔머리만 남아있는 로커처럼, 노동의 열악한 현실과 노동자들의 닳는 마음은 보이지 않는 곳으로 싼값에 치워버리고 그 튼튼하고 믿음직한 이미지만이 패션으로 자본주의 시장에 비싸게 팔리고 있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휑하니 쓸쓸하다.
검색창에 작업복이라고 치면 일하는 사람들이 입는 값싸고 질긴, 하지만 패션을 고려할 여유가 없는 투박한 옷들이 주로 나오고 워크웨어로 검색을 하면 더블 니, 샌드 워싱, 오일 워싱으로 멋을 낸 고가의 패션 브랜드 옷들이 주로 검색된다. 우리가 노동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이중적인 인식이 민망하게 드러나는 장면이다.
/이원석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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