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곳곳에 숨겨져 있는 항일유적지

 

민초의 흔적 고스란히 담긴 ‘오산감리교회’

폭격 후 재건설… 쓰러지지 않는 의지 표현

 

광복군 장준하 선생 기린 ‘파주 장준하 공원’

독립 의지 굳게 새겨져있는 묘역 위 ‘돌베게’

일제강점기 당시 유일하게 맞설 무기 ‘젊음’

조선이 독립된 나라이며 조선사람이 독립된 민족임을 선언한 3·1 운동은 서슬퍼런 일제강점기에 한줄기 빛이자 100년 뒤를 사는 후대가 자부심을 느낄 일대 사건이다.

아파트 베란다에 태극기를 다는 것으로, 종종 SNS나 메신저에 태극기를 띄우는 것으로 이날을 기억하곤 하지만 이보다 조금 더 적극적으로 3· 1 운동을 기릴 수 있는 방법이 있다.

우리 주변에 남아 있는 일제강점기 지어진 건물, 항일유적을 찾아가보는 것이다. 경기도엔 교과서에도 블로그에도 소개돼 있지 않은 항일 유적이 여럿이다.

경인일보가 지난 3년 동안 보도한 근대문화유산순례 기획, ‘전쟁과 분단의 기억’을 통해 찾아갔던 항일유적을 소개한다. 바로 독자의 곁 지근거리에 미처 알지 못한 항일 유적이 존재한다.

1954년 지어진 오산감리교회(돌교회)는 오산오색시장 속에 있다. 이 교회가 개척된 건 1904년의 일로, 오색시장(구 오산중앙시장)은 1914년 지금 위치에 자리 잡았다./신지영 기자 sjy@kyeongin.com
1954년 지어진 오산감리교회(돌교회)는 오산오색시장 속에 있다. 이 교회가 개척된 건 1904년의 일로, 오색시장(구 오산중앙시장)은 1914년 지금 위치에 자리 잡았다./신지영 기자 sjy@kyeongin.com

저잣거리 속 예배당, 민초의 성스로움 그대로

오산 최고(最古) 교회인 오산감리교회는 1904년 지어졌다. 1910년부터 1945년까지 이어진 일제강점기 직전이다. 오산오색시장 한복판에 들어선 오산감리교회는 지어진 지 얼마지 않아 일제강점기를 맞았고 한국전쟁을 거쳐 지금까지 왔다.

장을 보다가 맛집 갔다가 쉽게 찾아갈 수 있는, 오산시민도 쉬이 지나쳤을 오산감리교회는 직접적인 항일유적은 아니다. 하지만 개척자들의 정신을 살펴보면 어려운 한 시대를 헤쳐나가려 했던 민초의 감정을 느낄 수 있다는 점에서 항일유적이다. 이 정신이야말로 조선민이 일제강점기를 버텨낼 수 있었던 힘이라고 할만하다.

미국 선교사 노블 밀러가 오산리 442-2번 일대에 1904년부터 1905년에 걸쳐 교회를 개척했다고 전해진다. 한국감리교회 초기 역사에 노블 밀러라는 이름으로 기록된 선교사는 없다고 하는데 윌리엄 아더 노블과 룰라 아델리아 밀러를 묶어 지칭한 것으로 추정된다.

[전쟁과 분단의 기억·(6)] 폐허 위 쌓아올린 신앙 '오산감리교회·이천 양정교회'

[전쟁과 분단의 기억·(6)] 폐허 위 쌓아올린 신앙 '오산감리교회·이천 양정교회'

어 지칭하는 것으로 유추할 수 있는데 윌리엄 아더 노블과 룰라 아델리아 밀러는 19세기 선교사로 조선에 도착했다. 노블 목사의 부인인 매티 윌콕스 노블 여사는 배재학당에서 서양음악을 가르친 최초 여교사라고 한다. 노블 목사는 현재 오산·화성·수원을 엮은 하나의 행정구역이었던 수원지역에서 활동하며 선교와 교육활동에 매진했다. 노블 부부는 조선에서 두 아들을 이질로 잃었다.룰라 밀러 선교사는 1907년 수원삼일여학교 교장을 지냈다. 삼일여학교는 현재의 매향여자정보고등학교(구 매향여상)다. 수원시 매향동에 지어진 삼일여학교는 1902년 기독교 이념으로 건립됐다.1904년 초가로 지어진 '오산감리교회'일제시대 적벽돌로… 한국전쟁때 폭격1·4후퇴뒤 인민군 본부로 '기구한 운명'원조로 복구…현재도 오색시장 중심에노블·밀러 선교사에 의해 개척된 오산 최고(最古) 교회인 오산감리교회는 초기엔 초가(草家)로 지어졌다. 1907년 5월 3일의 일이다. 벽돌건물로 교회가 다시 건립된 건 1934년이다. 99㎡(30평) 가량 규모에 적벽돌로 지어진 교회는 한국전쟁 때까지 살아남았다. 1951년 1·4 후퇴 이후 인민군이 일대를 점령한 뒤론 인민군 본부로 쓰였다.교회에서 인민군 본부로 변한 기구한 운명에 적벽돌 건물은 폭격으로 사라지고 만다. 이후 1954년 7월 22일 오산리 844-7번지 일대에 198㎡(60평) 규모 현재의 돌예배당을 지었다. 조영행·조광현·이주찬·황달용이 대지를 기부했고 미군 물자와 복구비로 건립됐다고 전해진다.오산감리교회 돌예배당은 오산오색시장 한복판에 있다. 오색시장이라고 쓰인 정면 간판을 지나 20m 남짓 시장으로 이동하면 왼편에 예배당이 나타난다. 시장길은 아케이드 지붕으로 덮여 있고 교회 쪽은 지붕이
https://www.kyeongin.com/article/1715714

룰라 밀러 선교사는 1907년 수원삼일여학교(구 매향여상) 교장을 지내기도 했다. 초가로 지어졌던 오산감리교회는 일제강점기였던 1934년 벽돌건물로 재건축됐다. 이 건물은 한국전쟁 시기엔 인민군 본부로도 쓰였고 전쟁 과정에서 폭격을 맞아 폭파됐다.

1954년 지어진 오산감리교회(돌교회)는 오산오색시장 속에 있다. 이 교회가 개척된 건 1904년의 일로, 오색시장(구 오산중앙시장)은 1914년 지금 위치에 자리 잡았다./신지영 기자 sjy@kyeongin.com
1954년 지어진 오산감리교회(돌교회)는 오산오색시장 속에 있다. 이 교회가 개척된 건 1904년의 일로, 오색시장(구 오산중앙시장)은 1914년 지금 위치에 자리 잡았다./신지영 기자 sjy@kyeongin.com

지금 볼 수 있는 오산감리교회 돌예배당 건물은 1954년 지어진 것이다. 비록 일제강점기 당시의 건물은 아니어도 초가에서 적벽돌로 건물을 짓고 사라진 건물을 다시 돌예배당으로 바꿔서 올린 것에서 살고자 했고 다시 일어서려 했던 의지만은 충분히 느낄 수 있다.

조국 근대화에 대한 열망과 종교적 열정이 결합해 지어진 예배당은 소란스런 저잣거리 한 가운데 있다. 오색시장의 아케이드 지붕이 내리쬐는 햇빛을 막아 시장길엔 은은한 조도가 깔린다. 하지만 시장통과 맞닿은 오산감리교회엔 아케이드 없이 하늘이 뚫려 화사한 햇빛이 고스란히 예배당에 쏟아진다. 햇살을 머금은 오산감리교회 돌예배당은 하얀 빛을 내뿜는다. 반사한 것인지 스스로 빛나는 것인지 구분 되지 않게 빛난다.

그래서 오색시장에서 오산감리교회로 한 발자국을 옮기면 마치 세속에서 성스러운 공간으로 진입하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종교적 성스러움 뿐 아니라 당시를 치열하게 살았고, 끝내 생존한 민초의 역사가 만든 속세의 성스러움이다.

장준하공원에 있는 장준하 선생의 묘소. 2024.7.26 /이영지기자 bbangzi@kyeongin.com
장준하공원에 있는 장준하 선생의 묘소. 2024.7.26 /이영지기자 bbangzi@kyeongin.com

젊음이라는 무기, 광복 이끌어내다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이자 사상가, 언론인이었던 장준하(1918~1975)의 묘역이 경기도에 있다. 장 선생의 유해는 사망 이후 파주시 나사렛 천주교 공동묘역에 안치됐지만 장준하공원이 문을 열며 이장됐다. 장 선생은 대한민국임시정부 광복군에서 활동했고 1953년 월간지 사상계를 발행했다. 일제강점기 이후 민주화 운동을 하는 과정에서 투옥을 반복하며 탄압 받았고 결국 의문사로 생을 마감하게 된다.

묘역 위치는 파주시 탄현면이다. 장준하공원으로 조성된 이곳에는 돌베개가 있다. 묘역 위에 얹힌 널따란 돌은 단번에 돌베개를 연상케 한다. 묘역의 돌베개는 동명의 회고록에서 따온 것이다. 중국에서 펼쳐진 항일활동을 담은 장 선생의 회고록 제목 ‘돌베개’는 성서가 전하는 야곱의 이야기에서 따왔다.

건국훈장·돌베개… 애국지사들 '역사의 퍼즐' 찾아서 [전쟁과 분단의 기억 시즌2·(10·광복)]

건국훈장·돌베개… 애국지사들 '역사의 퍼즐' 찾아서 [전쟁과 분단의 기억 시즌2·(10·광복)]

직 개발로 사라지고 방치된 공간들 대다수■ 심상각 선생 집터 뒷산의 묘소'애국지사 심상각 선생의 묘'파주시 광탄면 심상각 선생의 집터 뒷산을 10분여 올라가니 건국훈장 애국장 비석과 팻말이 선생의 묘소를 친절히 알려준다. 수풀이 우거져 있지만 팻말과 비석 덕분에 단번에 심상각 선생의 묘소를 찾을 수 있었다.1919년 3월, 우산 심상각 선생은 파주 만세운동을 주동한 인물 중 하나다. 광탄면사무소 앞에 집결한 2천여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고 봉일천리 장터에 있던 1천여명과 합세해 봉일천 헌병주재소를 습격했다. 파주 만세운동은 경기 북부지역 최대 규모였다고 전해진다.격렬한 만세운동 이후 심상각 선생은 중국 상해로 망명해 상해임시정부에서 활동했다. 당시 상해임시정부 내무부 장관인 박찬익 선생의 협조로 합류한 심상각 선생은 상해에서도 독립운동의 중추적 역할을 했다고 한다.심상각 선생이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 건 약 15년만이었다. 심상각 선생은 국내에 돌아와서 신간회에 가입해 활동했을 뿐만 아니라, 파주 광탄면에 광탄보통학교를 설립하고 교장으로 역임하는 등 후진 양성에 전념했다. 광탄보통학교에 관한 별도 기록이 없기 때문에 설립 및 운영과정은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고 있다.그후 심상각 선생은 자신과 함께 만세운동을 하다가 희생된 동지들을 위한 위령제를 하는 등 애국지사 선양사업에 힘쓰다가 1954년 11월 9일, 향년 66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심상각 선생의 집터와 묘소는 선생의 종손인 심재만(82)씨가 지키고 있다. 집터 바로 옆에 지은 집에서 살고 있는 심재만씨는 할아버지를 기억하기 위해 찾는 이들을 위한 '가이드' 역할을 자처하고 있었다.심재만씨는 심상각 선생이 독립운동가로 인정받게 된 문서와 사진자료 등 그동안 모아
https://www.kyeongin.com/article/1715778

야곱이 형을 피해 브엘세바를 떠나 하란으로 향하던 중 해가 져 돌을 베개로 삼아 잠을 청한 일화다. 야곱이 잠에 들어 신으로부터 약속을 받은 것에 빗대 장 선생은 고된 항일여정과 미래의 희망을 암시했다. 조국 광복의 희망이 돌베개이며 편안함에 머물지 않고 끝까지 가겠다는 의지가 돌베개다. 장준하공원에 장 선생이 묻힌 묘역에 바로 그 돌베개가 있다.

비가 오는 날이면 베개의 머리를 누이는 부분, 음푹 패인 돌베개 위에 얕은 물이 고인다. 호텔 침구처럼 깊게 파묻히지 않고 딱딱한 표면 위로 얕게만 고여 고단함 속에 평생을 바지런히 헌신한 장 선생의 모습 같다.

장준하공원에 새겨진 글귀는 이렇다.

“우리는 무기를 가졌습니다. 조국을 찾아야 한다는 목표물을 똑바로 겨냥한, 젊음이란 이름의 무기입니다”

신식 총과 잘 벼려진 칼, 든든한 군량미가 무기가 아니라 조국 광복을 염원한 젊은이들이 바로 독립 조선의 유일한 무기였다. 장 선생의 말을 빌자면 3·1절은 106년 된 오래된 기념일이 아니라 젊은 독립 투사의 날, 가장 젊은 국경일이다.

/신지영·이영지기자 sjy@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