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곳곳에 숨겨져 있는 항일유적지
민초의 흔적 고스란히 담긴 ‘오산감리교회’
폭격 후 재건설… 쓰러지지 않는 의지 표현
광복군 장준하 선생 기린 ‘파주 장준하 공원’
독립 의지 굳게 새겨져있는 묘역 위 ‘돌베게’
일제강점기 당시 유일하게 맞설 무기 ‘젊음’
조선이 독립된 나라이며 조선사람이 독립된 민족임을 선언한 3·1 운동은 서슬퍼런 일제강점기에 한줄기 빛이자 100년 뒤를 사는 후대가 자부심을 느낄 일대 사건이다.
아파트 베란다에 태극기를 다는 것으로, 종종 SNS나 메신저에 태극기를 띄우는 것으로 이날을 기억하곤 하지만 이보다 조금 더 적극적으로 3· 1 운동을 기릴 수 있는 방법이 있다.
우리 주변에 남아 있는 일제강점기 지어진 건물, 항일유적을 찾아가보는 것이다. 경기도엔 교과서에도 블로그에도 소개돼 있지 않은 항일 유적이 여럿이다.
경인일보가 지난 3년 동안 보도한 근대문화유산순례 기획, ‘전쟁과 분단의 기억’을 통해 찾아갔던 항일유적을 소개한다. 바로 독자의 곁 지근거리에 미처 알지 못한 항일 유적이 존재한다.

저잣거리 속 예배당, 민초의 성스로움 그대로
오산 최고(最古) 교회인 오산감리교회는 1904년 지어졌다. 1910년부터 1945년까지 이어진 일제강점기 직전이다. 오산오색시장 한복판에 들어선 오산감리교회는 지어진 지 얼마지 않아 일제강점기를 맞았고 한국전쟁을 거쳐 지금까지 왔다.
장을 보다가 맛집 갔다가 쉽게 찾아갈 수 있는, 오산시민도 쉬이 지나쳤을 오산감리교회는 직접적인 항일유적은 아니다. 하지만 개척자들의 정신을 살펴보면 어려운 한 시대를 헤쳐나가려 했던 민초의 감정을 느낄 수 있다는 점에서 항일유적이다. 이 정신이야말로 조선민이 일제강점기를 버텨낼 수 있었던 힘이라고 할만하다.
미국 선교사 노블 밀러가 오산리 442-2번 일대에 1904년부터 1905년에 걸쳐 교회를 개척했다고 전해진다. 한국감리교회 초기 역사에 노블 밀러라는 이름으로 기록된 선교사는 없다고 하는데 윌리엄 아더 노블과 룰라 아델리아 밀러를 묶어 지칭한 것으로 추정된다.
룰라 밀러 선교사는 1907년 수원삼일여학교(구 매향여상) 교장을 지내기도 했다. 초가로 지어졌던 오산감리교회는 일제강점기였던 1934년 벽돌건물로 재건축됐다. 이 건물은 한국전쟁 시기엔 인민군 본부로도 쓰였고 전쟁 과정에서 폭격을 맞아 폭파됐다.

지금 볼 수 있는 오산감리교회 돌예배당 건물은 1954년 지어진 것이다. 비록 일제강점기 당시의 건물은 아니어도 초가에서 적벽돌로 건물을 짓고 사라진 건물을 다시 돌예배당으로 바꿔서 올린 것에서 살고자 했고 다시 일어서려 했던 의지만은 충분히 느낄 수 있다.
조국 근대화에 대한 열망과 종교적 열정이 결합해 지어진 예배당은 소란스런 저잣거리 한 가운데 있다. 오색시장의 아케이드 지붕이 내리쬐는 햇빛을 막아 시장길엔 은은한 조도가 깔린다. 하지만 시장통과 맞닿은 오산감리교회엔 아케이드 없이 하늘이 뚫려 화사한 햇빛이 고스란히 예배당에 쏟아진다. 햇살을 머금은 오산감리교회 돌예배당은 하얀 빛을 내뿜는다. 반사한 것인지 스스로 빛나는 것인지 구분 되지 않게 빛난다.
그래서 오색시장에서 오산감리교회로 한 발자국을 옮기면 마치 세속에서 성스러운 공간으로 진입하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종교적 성스러움 뿐 아니라 당시를 치열하게 살았고, 끝내 생존한 민초의 역사가 만든 속세의 성스러움이다.

젊음이라는 무기, 광복 이끌어내다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이자 사상가, 언론인이었던 장준하(1918~1975)의 묘역이 경기도에 있다. 장 선생의 유해는 사망 이후 파주시 나사렛 천주교 공동묘역에 안치됐지만 장준하공원이 문을 열며 이장됐다. 장 선생은 대한민국임시정부 광복군에서 활동했고 1953년 월간지 사상계를 발행했다. 일제강점기 이후 민주화 운동을 하는 과정에서 투옥을 반복하며 탄압 받았고 결국 의문사로 생을 마감하게 된다.
묘역 위치는 파주시 탄현면이다. 장준하공원으로 조성된 이곳에는 돌베개가 있다. 묘역 위에 얹힌 널따란 돌은 단번에 돌베개를 연상케 한다. 묘역의 돌베개는 동명의 회고록에서 따온 것이다. 중국에서 펼쳐진 항일활동을 담은 장 선생의 회고록 제목 ‘돌베개’는 성서가 전하는 야곱의 이야기에서 따왔다.
야곱이 형을 피해 브엘세바를 떠나 하란으로 향하던 중 해가 져 돌을 베개로 삼아 잠을 청한 일화다. 야곱이 잠에 들어 신으로부터 약속을 받은 것에 빗대 장 선생은 고된 항일여정과 미래의 희망을 암시했다. 조국 광복의 희망이 돌베개이며 편안함에 머물지 않고 끝까지 가겠다는 의지가 돌베개다. 장준하공원에 장 선생이 묻힌 묘역에 바로 그 돌베개가 있다.
비가 오는 날이면 베개의 머리를 누이는 부분, 음푹 패인 돌베개 위에 얕은 물이 고인다. 호텔 침구처럼 깊게 파묻히지 않고 딱딱한 표면 위로 얕게만 고여 고단함 속에 평생을 바지런히 헌신한 장 선생의 모습 같다.
장준하공원에 새겨진 글귀는 이렇다.
“우리는 무기를 가졌습니다. 조국을 찾아야 한다는 목표물을 똑바로 겨냥한, 젊음이란 이름의 무기입니다”
신식 총과 잘 벼려진 칼, 든든한 군량미가 무기가 아니라 조국 광복을 염원한 젊은이들이 바로 독립 조선의 유일한 무기였다. 장 선생의 말을 빌자면 3·1절은 106년 된 오래된 기념일이 아니라 젊은 독립 투사의 날, 가장 젊은 국경일이다.
/신지영·이영지기자 sjy@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