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본 없는 복사본의 시대, 오래된 상상
벽화에서 물소리 들려 지우게 한 황제
그림속 나무 흔들어 과일을 얻은 동화
그림 받은 이들은 과욕 탓에 결국 처벌

솔거가 그린 노송도에 까마귀와 참새가 날아들었다는 일화는 신비롭긴 해도 있음직한 사건이다. 중국 양나라 장승요(張僧繇)가 금릉에 있는 어느 절 벽에 그려진 용의 눈에 눈동자를 찍으니 용이 벽에서 나와 승천했다고 하는 화룡점정(畵龍點睛)의 고사는 곧이 듣기 어렵다. 언중들은 멋진 풍경을 보면 그림같이 아름답다고 하면서 현실을 가상과 뒤바꾸어 말하기도 하지만 그림의 떡을 먹을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다. 가상은 가상이요 현실은 현실이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이미지가 실체를 대체해가고 있다. 이미지는 기호가 아니다. 보드리야르(Baudrillard)는 현대사회는 물질도 상품도 아닌 가짜 복제물인 시뮬라크르를 생산하고 소비하는 사회라고 말한다. 우리는 원본 없는 복사본의 시대, 실체가 아닌 가상의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이다. 증강현실이나 메타버스기술의 발전으로 현실과 가상의 경계가 사라진 3차원의 가상세계가 출현했으며 가상 자아인 아바타가 현실적 자아인 나를 대체하기 시작했다.
메타버스와 같은 상상은 오래된 것이다. 대표적인 것이 현실과 가상이 뒤섞이는 마법의 그림에 관한 이야기이다. 프랑스 철학자 레지스 드브레(Debray)가 소개한 마법의 그림 이야기는 중국의 한 황제가 궁중화가에게 벽화를 그리게 했는데 밤에 벽화에서 물소리가 들려와 잠을 잘 수 없어 그 벽화를 지워버리라고 지시했다는 것이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아마도 당 현종과 화가 이사훈(李思訓, 651~716년)일 것이다. 당 현종이 궁전을 새로 지으면서 벽화를 이사훈에게 맡겼는데 밤중에 그 그림에서 물소리가 들릴 정도로 신비한 작품이라고 극찬했다는 이야기가 설화집 ‘태평광기’에 나오기 때문이다.
제물포의 의료선교사 랜디스가 수집하여 영어로 번역한 한국의 동화 가운데서도 마법의 그림 이야기가 있다. ‘지혜로운 화가’(The tale of the clever artist)라는 제목의 동화이다. 옛날 그림을 잘 그리는 선비가 있었는데 그의 친구는 가난한 평민이었다, 가난한 친구가 굶고 있는 것을 보다 못해 과일나무 그림을 하나 그려주었다. 이 그림 속의 과일 나무를 흔들면 하루 먹을 만큼의 과일이 떨어졌다. 그런데 욕심을 내어 마구 흔들어 과일이 더 이상 떨어지지 않게 되자 다시 가난해졌다. 양반은 이번에는 미인을 그린 그림을 주었다. 끼니 때마다. 그림 속에서 여자가 나와서 상을 차려주었는데 여자를 쳐다보지 말라는 선비의 부탁을 어기고 말았다. 밥을 차려주던 여인은 사라지고 이 기이한 이야기를 관가에서 알게 되어 잡혀가게 되었다. 그림을 그려준 화가도 불려와 큰 벌을 받게 될 순간, 당나귀 그림을 그려서 그 당나귀를 타고 두 사람은 어디론가 사라진다는 이야기이다.
이와 유사한 이야기가 김포 월곶면이나 인천 대곡동에도 전해지고 있다. 월곶면 이야기는 서당 훈장이 가난한 이웃사람을 위하여 대추나무를 그려주었는데 나무를 흔들 때마다. 대추가 한 되씩 떨어져 가난을 면하게 되었는데 어느날 욕심이 생겨 대추나무를 마구 흔들어 대는 통에 대추도 더 얻지 못하고 결국 관가에 잡혀가게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검단 대곡리 전래동화도 한 화가가 가난한 친구에게 당나귀 그림을 그려주어 먹고 살게 해 주었지만 친구가 욕심을 내는 바람에 들통이 나서 관가에 잡혀가게 된다는 이야기이다.
마법의 그림 이야기는 과일이나 밥이 나오는 신비한 그림을 받아 가난을 면하게 된 사람이 지나친 욕심 때문에 처벌을 받거나 추방된다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림을 그려준 화가에 대해서도 엄벌하는 것은 부자나 관가의 재물을 털어 가난한 이를 돕는 의적 이야기와 마찬가지로 체제 위협적인 인물이기 때문이다. 한편 이 마법의 그림 이야기에서 과일은 그림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관가의 창고 등에서 훔쳐 온 것으로 설정되어 있어 환상적이고 마법적 줄거리와 달리 내용적으로는 다분히 현실주의적인 설화라는 점에서 새로운 분석이 필요하다.
/김창수 인하대 초빙교수·객원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