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자동차·한류 등 견실하다 믿었지만
국제 변화… 성장 가속 韓, 알몸으로 깨어나
중차대 시기 尹 석방, 모든 판결 정치 귀결
尹·李 운명 헌재·법원에… 불행 목격 두려워

대한민국이 위기다. 탄핵정국 이야기가 아니다. 낭떠러지 끝에 선 대한민국이다. 대한민국은 해방과 건국과 전쟁의 10년을 지나 60년대부터 단 한순간도 성장을 멈추지 않았던 기적의 국가다. 인구감소가 떨떠름했지만 반세기 넘게 진화한 성장 유전자로 극복할 수 있다는 낙관이 우세했다. 반도체가 건재하고 자동차가 탄탄하며 제조·건설산업 경쟁력은 견실하다 믿었다. 한류 열풍은 ‘국뽕’ 수준을 넘어 세계적인 문화현상으로 확장됐고, 국가와 국민은 5천년 역사에 없던 자존감을 누린다.
향수의 향기는 시간이 지나면 사라진다. 미친 조향사가 제조한 향수의 향기에 취해 집단쾌락에 빠진 군중들은 향기가 사라진 광장에서 벌거벗은 채 깨어나자마자 부끄러운 나체를 가리고 뿔뿔이 흩어진다. (영화 ‘향수’) 성장의 향기에 취했던 대한민국이 국제광장에서 알몸으로 깨어나는 형세다. 성장의 발판이었던 미국이 변했다. 동맹이 아닌 수탈자로 돌변해 우리 안보와 경제의 디딤돌을 부수고 있다. 예정된 미·북 정상회동은 ‘패싱 코리아’ 외교의 서막을 올릴 수 있다.
낙관에 기대 혁신을 지체한 대가도 잔인하다. 반도체는 경영 리스크와 주 5일 8시간 연구로 대만과 중국 사이에서 숨쉬기 힘들 지경이 됐다. 원부자재 없는 나라의 산업은 국제시장에선 언제든지 미미해질 수 있고, 옹색한 내수시장이 감당하기엔 거대하다. 삼성전자와 현대자동차는 본사의 국적 변경을 심각하게 고민할 처지에 몰릴지 모른다. 국가 성장의 결과가 극단적으로 분산된 양극화 현상으로 고착된 경영과 노동의 불화는 사회적 분열의 원점이다. 촘촘하게 분열된 세대, 계층, 남녀가 대한민국의 진화를 방해한다. 유전자는 급격한 환경 변화에 취약하다. 적응 여부에 따라 진화하거나 퇴화한다. 달라진 미국이 주도하는 국제질서 격변과 우리 내부에 잠복했던 열성인자들이 결합하면 나라가 나락으로 추락한다.
국제질서를 주시하고 국가 혁신에 전념할 중차대한 시기에 국가가 멈춘 지 100일을 넘겼다. 윤석열 대통령이 법원의 구속 취소 결정으로 지난 8일 체포 구금된 지 52일 만에 석방됐다. 검찰의 관행적인 구속기간 산정과 고양이 이빨로 사자의 뼈를 부수려 한 공수처의 과욕이 빚어낸 장면이다. 지지자들은 구치소에서 한남동에서 열렬히 환영했다. 일부 언론들은 지지자를 마주한 대통령의 ‘울컥’을 제목으로 달았다. 대통령을 석방한 법원의 판단과 비상계엄의 위헌을 가늠하는 헌법재판소의 심판은 완전히 별개다. 광장의 지지자들은 법원의 석방 결정과 헌재의 기각 결정을 등치 시킨다. 그들에게 다른 결론은 전쟁 선포다. 대통령의 ‘울컥’에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다.
제1야당 민주당은 대통령의 석방으로 헌재의 심판이 지연될까 공포에 휩싸였다. 이재명 대표가 대법원의 재판에 갇히기 전에 대선을 성사시켜야 하는 시간표가 수정되면 악몽이다. 검찰총장을 고발했고, 최상목 대통령권한대행과 함께 묶어 탄핵안 발의를 고민한다. 탄핵반대에 밀렸던 광장의 열세를 만회하려 탄핵찬성 집회에 힘을 싣고 나섰다. 민주당의 당면 목표는 대법원 판결 전 이재명 대통령 만들기다. 그 외의 모든 것은 터럭이다.
헌재의 심판과 법원의 재판이 모두 정치가 됐다. 윤석열에 취한 군중은 이재명의 집권을 두려워한다. 이재명에 취한 대중은 윤석열의 직무복귀를 혐오한다. 두 사람의 운명은 헌재와 법원에 매달려있다. 심판과 재판으로 두 사람의 운명을 동시에 확인하지 않는 한 분열된 정치공동체 중 한쪽은 내전의 동력으로 남겨진다. 광장의 취한 군중을 한꺼번에 깨우지 않고는 현재의 분열을 치유하기 힘들다. 수치도 각성도 모두의 것이어야 덮을 수 있다. 윤석열, 이재명 두 사람의 법적 운명을 동시에 확인할 헌재와 법원의 대국적 시차 조정을 기대해 본다. 자칫하다 우리 모두가 대한민국 쇠락의 결정적 장면을 지켜본 불행한 목격자가 될까 두려워 품어본 기대다.
/윤인수 주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