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자독식과 대통령 탄핵 얼룩진 6공화국
새 시작하자는 의지 있지만 총론만 무성
유정복 인천시장 제안, 각론으로서 의미
제왕적 해체와 의회 권력 견제 방식 흥미

1787년 제정된 헌법에 따라 연방제 공화국인 미합중국이 탄생한 게 1789년 4월30일의 일이다. 숱한 정치적 변화에도 단일 공화국의 연속성을 유지해 온 유일한 국가다. 이어 출범한 프랑스 공화국은 미국과 달리 3세기에 걸쳐 부침을 거듭한 끝에 오늘의 제5공화국에 이르렀다. 공화정으로선 이것저것 안 해 본 것 없는, 그야말로 ‘산전수전+공중전’의 역사다. 배경은 크게 다르나 민의(民意)와 격동(激動)이라는 키워드로만 보면 우리의 공화국 역사와 비교하며 깊숙이 들여다볼 만하다.
1791년 9월3일, 프랑스 최초의 헌법이 제정됐다. 3년 전 바스티유 감옥 습격 사건을 계기로 시작된 ‘대혁명’의 산물이었다. 신으로부터 권력을 위임받은 존재였던 왕은 법에 따라 국가를 대표하는 자로 격하됐다. 이듬해 9월21일 첫 소집된 국민공회는 아예 입헌군주제의 폐지를 만장일치로 결정했다. 그리고 나흘 뒤 ‘유일불가분(唯一不可分)’의 공화국 탄생을 선언한다. 이후 불과 12년간의 짧은 프랑스 제1공화국 체제에서 네 차례나 헌법이 바뀌었다. 국민공회로 시작해 총재정부와 통령정부를 거쳐 제정(帝政)으로의 역주행을 택함으로써 제1공화국을 마감하게 된다.
제2공화국 역시 들라크루아의 그림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의 배경이 된 1830년 ‘7월 혁명’으로 시작돼 1848년 ‘2월 혁명’으로 마무리된 일련의 민중봉기의 결실이었다. 1848년 세계 최초로 시행된 전 국민 투표를 거쳐 루이 나폴레옹이 공화국 초대 대통령으로 당선된다. 하지만 3년 뒤 큰아버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와 똑같이 쿠데타를 일으켜 황제의 자리에 오르면서 스스로 제2공화국의 문을 닫았다. 1870년 비스마르크 총리가 이끄는 프로이센과의 전쟁에서 패배해 실각했는데 이 전쟁의 후과로 프로이센의 지배를 받게 된 프랑스 알자스와 로렌 지방에서의 마지막 자국어 수업을 다룬 게 알퐁스 도데의 단편소설 ‘마지막 수업’이다.
지금의 프랑스 제5공화국은 1958년 10월에 제정된 헌법에 기초한다. 요즘 한국에서 회자하는 식으로 표현하자면 ‘58년 체제’인 셈이다. 의원내각제를 채택한 제3, 4공화국의 정치·경제적 불안정을 반면교사 삼아 샤를 드골이 발의한 이원집정부제 헌법을 채택했다. 대통령은 막강한 권력을 가졌으나 총리와 행정권을 나눠 갖는 분권형 대통령제라는 점에서 우리나 미국과 다르다. 대통령이 총리를 임명하고, 총리는 의회에 책임을 진다. 여당이 아닌 다수당 출신을 총리로 임명함으로써 ‘동거정부’를 구성하기도 한다. 그 체제를 지금 67년째 유지하고 있다.
230년 프랑스의 시간엔 미치지 못하겠지만 드라마틱하게 압축된 80년 공화국 역사를 가진 우리가 다시 새로운 공화국의 시간을 만들어내려 한다. 개헌(改憲)을 위한 공론의 장이 속속 형성되고 있다. 승자독식과 대통령 탄핵으로 얼룩진 제6공화국 시대를 끝내고, 새 공화국을 시작하자는 의지다. 개헌 그 자체가 곧 새 공화국의 성립을 뜻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그 시작점이고 필수의 조건이다. 개헌의 강을 건너야 새 공화국이 열린다. 그런데도 총론만 무성할 뿐이었다.
지난 4일 유정복 인천시장이 시도지사협의회장 자격으로 제안한 개헌안은 처음 모습을 드러낸 각론으로서의 의미가 있다. 제왕적 대통령제의 해체와 함께 의회 권력의 견제도 읽힌다. 국회를 양원제로 하되 광역 지방정부 대표들로 상원을, 중·대선거구제로 선출된 의원들로 하원을 각각 구성하는 방식은 흥미롭다. 자치입법권과 자주재정권 등 지방정부의 자치 권한을 실질적으로 강화하는 내용도 시대의 흐름을 담아내고 있다.
시도지사협의회의 합의된 안이 아니라는 반발도 있고,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를 견제하려는 의도로 해석될 수 있는 조항들을 포함하고 있다는 점 등에서 흠결과 논란의 여지가 없는 건 아니나 충분히 논의할 만한 가치가 있는 개헌안이다. 때마침 오늘 유 시장의 정치적 거점인 인천에서 이 개헌안을 놓고 시민토론회가 열린다. 그 속내를 읽고 있을 거점의 의지부터 어떻게 반응할지 자못 궁금하다.
/이충환 서울대 객원교수·객원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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