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극 세종기지 대원 폭행사건
피해자만 강제 귀국 조치
“연구자 입장서 너무 괴로운 일”

남극 세종과학기지(이하 세종기지)에서 수년 전 대원 폭행 사건이 벌어졌던 것으로 뒤늦게 알려졌다. 상급자인 가해자에 대한 징계 등 처분은 아직 이뤄지지 않았고, 피해자는 ‘입남극 제한’ 조치로 극지에 발을 붙이지 못할 수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
대기과학을 연구하는 A씨(당시 20대)는 2020년대 초반 인천 송도국제도시 소재 극지연구소에서 모집한 ‘세종기지 월동연구대’에 선정됐다. 월동연구대는 당시 극지연구소 소속 대장·총무 2명과 계약직 대원 16명 등으로 구성돼 1년간 남극에 파견됐다.
남극 도착 후 5개월 정도 지난 무렵인 5월4일 오후 8시50분께 당직자였던 A씨는 순찰 도중 세종기지 내 생활관에서 술을 마시고 있던 동료 대원과 대화를 나눴다. 그때 월동연구대장 B씨가 나타나 욕설을 하며 조용히 하라고 소리친 뒤 A씨의 왼쪽 팔을 잡아당겨 꺾었다. A씨는 평소 일상을 기록하기 위해 휴대용 카메라를 들고 다녔는데, 당시 상황을 촬영하려 한 것으로 B씨가 오해한 것 같다며 억울함을 호소했다. A씨는 “다음 날 B씨에게 폭력을 행사한 것에 대해 부당함을 설명했지만 사과를 받지 못했다”고 말했다. A씨는 염좌와 팔 부위 멍으로 2주간 치료를 받았다.
A씨는 그해 11월12일에야 폭행 피해 사실을 극지연구소에 보고했다. 극심한 추위가 찾아오는 남극의 겨울은 보통 6월부터 시작해 24시간 내내 어두운 밤이 계속된다. 외부 이동이 제한되는 시기라서 문제 제기를 해봤자 B씨와 분리 조치 등이 이뤄지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보고를 받은 극지연구소는 가해자인 B씨가 아닌 A씨에게 조기 귀국을 권유했으나 A씨는 응하지 않았다. 이후 B씨는 12월5일 세종기지에서 자체 인사소위원회를 열고 A씨 등 대원 6명에게 순찰 미실시, 근무 태만, 허위 보고 등 사유로 향후 남극에 들어오지 못하는 ‘입남극 제한’ 조치를 내렸다. 또 A씨에겐 강제 귀국이 결정됐다. 남극 근무 종료를 1개월여 앞둔 때였다.
극지연구소는 월동연구대가 돌아온 이듬해 1월부터 B씨를 상대로 조사에 착수했다. 폭행 외에도 B씨의 “갑질이 있었다”는 대원 다수의 증언이 나왔다. 조사가 시작되자 B씨는 명예가 훼손되고 모욕을 느꼈다며 A씨 등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극지연구소는 송사 중인 사안이라는 이유로 조사를 중단했다.
A씨는 B씨를 폭행 혐의로 경찰에 고소했다. 법원에서는 지난해 12월20일 B씨에게 유죄(벌금 30만원) 판결을 내렸다. 반면 B씨가 A씨를 상대로 제기한 명예훼손·모욕은 무혐의가 나왔다.
극지연구소는 법원 판결이 나왔는데도 B씨에게 별다른 조치를 하지 않고 있다. A씨는 “계약직이었던 피해자는 수년간 소송에 매달리고 가해자는 아무렇지 않게 직장을 계속 다니고 있다”며 “연구자 입장에서 앞으로 남극에 가지 못할 것이란 생각을 하면 너무 괴롭다”고 토로했다.
이에 대해 B씨는 “팔을 꺾은 게 아니라 카메라 촬영을 제지하는 과정이었다. 폭행을 인정할 수 없어 항소 절차를 밟고 있다”며 “입남극 제한 조치는 이와 별개로 A씨의 잘못된 행동 등으로 이뤄졌던 것”이라고 반박했다.
극지연구소 관계자는 “최근 관련 민원이 접수돼 필요한 절차를 이행 중”이라며 “당시 세종기지에서 A씨의 입남극 제한 의견이 나온 것은 맞지만 상위 심의 기구에서 확정은 안 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조경욱기자 imjay@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