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레이트 지붕 벗겨진 페인트 칙칙

이 집에 들어온후 좋은일 많이 안겨

도심서 단독주택 통째로 쓰는 자유

스페인어 강사와 나눠 썼던 경험도

책 만들고 글·인터뷰 꾸준히 이어져

김예옥 출판인
김예옥 출판인

주인할머니가 지난해 12월, 세상을 떠났다.

필자가 임대해 쓰고 있는 사무실 공간은 오래된 옛날집이다. 2019년, 필자가 이곳에 들어오게 된 것은 전적으로 할머니의 권유 때문이었다. 당시 할머니는 거동이 불편해 이 집을 떠나 바로 옆의 이동식주택으로 옮겨갔다. 옛날집은 그렇게 2~3년간 비어있었다. 할머니는 필자를 볼 때마다 “우리집에 들어올 사람 없을까? 사람 좀 소개해봐” 하셨다. 할머니의 요청대로 필자도 아는 사람들에게 집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세입자는 쉽게 찾아지지 않았다. 모두 깔끔한 현대식 주택을 원했다.

사실 이 일대는 서울구치소가 코앞에 있는 자연부락이었다. 구치소 때문에 개발제한구역으로 묶이면서 딱지가 있어야 집을 지을 수 있었고 마을 전체가 20~30집에 불과했다. 딱지를 사서 집을 지은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10여 년 전, 순식간에 마을이 연립주택 단지로 변했다. 3개월이면 단지 하나가 완성되는 날림 연립들이었다. 공사현장을 지켜보면 저런 집에는 도저히 들어갈 수 없겠구나 하는 맘이 들 정도였다. 마을 사람들은 집을 팔고 외지 아파트로 떠나거나 5층짜리 빌라를 세워 맨 꼭대기층에 거주하고 있었다. 마을 노인회장은 “이렇게 싸구려 빌라가 들어올 마을이 아닌데!”하면서 마을이 망가진 것을 아쉬워했다.

연립주택 틈새에 낀 이 옛날집은 더욱 남루해 보였다. 슬레이트 지붕은 하늘색 페인트가 벗겨져 칙칙했고 밖의 시선을 차단하느라 출입문을 가로막은 패널 외벽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이 집에 들어가면 기운이 막힐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필자는 할머니께 “할머니! 제가 이 집에 들어와 서당(書堂)을 할까요? 아이들이 왁자지껄하면 할머니도 심심하지 않으시겠죠?” 했다. 할머니는 반색을 하며 “그럼 좋지! 사람들이 많이 드나들면 더 좋지” 하셨다. 무엇 때문에 필자가 복덕방 역할까지 하면서 이 집을 걱정했는지 모르지만 달리 말하면 이 집의 임자는 처음부터 필자가 아니었을까? 동향(東向)이어서 아침에 잠깐 해가 비치다 마는, 그래서 너무 밝은 것을 싫어하는 필자와 사이클이 맞았던 건 아니었을까? 다만 필자가 감당하기엔 집이 너무 커서 들어오길 망설였을 뿐이다. 필자가 이사 오던 날 할머니의 아들은 “어머님이 살아 계시는 동안에는 집을 헐지 않고 그대로 둘 거예요”라고 말했다. 필자는 “여기 땅값이 그렇게 비싼데 그냥 놔둔다고요? 진짜 효자시네요”라고 응수했다.

만 6년이 지난 지금까지 이 집은 실제 필자에게 좋은 일을 많이 안겼다. 우선 도심에서 넓은 단독주택을 통째로 쓰는 자유를 만끽하게 해주었다. 또 밖에 화분을 내놓을 수 있고, 문만 열면 땅을 밟을 수 있으며, 자투리땅에 채소나 화초를 심을 수 있어 전원생활을 하는 듯했다. 마을 한가운데지만 큰길과는 외져 절간이 따로 없을 정도로 조용했다.

처음 2년간은 외국인과 사무실을 나누어 썼다. 스페인어 강사였던 외국인도 오래된 집을 좋아해서 필자가 이 집을 얻는다고 하자, 군침을 흘렸다. 그래서 우리는 공동체처럼 공간을 활용해보기로 했다. 외국인은 지저분하고 막혀있던 집 구석구석을 만졌고 화단까지 조성해 새로운 분위기를 만들었다. 필자는 그 보답으로 매일 점심을 대접했다. 묵은지로 김치찌개를 해주면 외국인은 마치 ‘소울 푸드’를 만난 듯 탐스럽게 먹었다. 한국어를 가르치고, 스페인어를 가르치면서 안 되는 언어로 의사소통을 시도하던 경험은 색달랐다.

필자의 고유한 일, 즉 책을 만드는 일과 글 쓰고 인터뷰하는 일이 꾸준히 이어지기 시작한 것도 이 집에서였다. 집터가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었는지 아니면 체력이 좋아졌는지 모르겠지만 집중할 수 있었고 그 결과는 꽤 괜찮았다.

며칠 전 필자는 할머니의 아들에게 “제가 언제 이 집을 비워줘야 하죠? 떠나기 전에 저는 화가한테 이 집을 그려달라고 해서 보관하려고요. 곧 없어질 거잖아요. 두 점을 주문해서 하나씩 간직할래요?” 했다. 아들은 이렇게 대답했다. “그러셔요.”

/김예옥 출판인

<※외부인사의 글은 경인일보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