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상록수’ 채영신 삶 그린 작품

일제 당시 문맹 퇴치·사회개혁 활동

21세기 빈곤·인권 사회적 관심 환기

노숙인과의 관계, 공동체 일원 접근

강사비 등 예산 필요 공공이 나서야

최준영 (사)인문공동체 책고집 이사장
최준영 (사)인문공동체 책고집 이사장

심훈의 ‘상록수’는 일제 강점기에 야학 활동을 했던 최용신(작중 채영신)의 삶을 그린 소설이다. 작중 채영신은 단지 야학 교사로만 활동한 게 아니었다. 문맹 퇴치를 통해 농촌의 젊은이들이 사회개혁의 주체로 일어설 토대를 구축하는 계몽활동가였으며, 독립운동가였다.

일제 강점기의 농촌 야학은, 해방공간에서 노동자 야학으로 이어졌고, 1970년대 산업화 시대에는 노동야학과 생활야학(검정고시 야학)으로 나뉘어 저마다의 역할을 해왔다. 오늘날의 야학은 장애인 야학과 어르신을 위한 문해교육, 지역의 저소득층을 위한 인문학 강좌 등으로 다각화하고 있다.

1980년대 초반 필자는 야학 학생이었다. 낮에는 구두공장에서 일했고, 밤에는 야학으로 달려가 이념의 맹아를 틔우는 대학생 교사의 영향을 받으며 사회현실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대학 재학 중엔 야학 교사로 활동했고, 이후 질곡의 사회생활 끝에 다시 야학과의 인연을 잇고 있다. 2005년 노숙인 인문학 강좌에 참여한 이래 20여 년 동안 줄기차게 가난한 이웃들과 삶의 이야기를 나누고 있으니 말이다. 학생에서 교사로, 다시 ‘거리의 인문학’ 강사로, 참으로 기나긴 인연이다.

21세기형 야학인 거리의 인문학은 얼핏, 20세기 야학의 연장선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교육 대상과 시대 상황, 내용 면에서 차이가 크다. 20세기 야학이 농민과 노동자를 위해 존재했다면, 거리의 인문학은 노동조차 할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한 야학이다.

20세기 야학이 대학생을 주축으로 변혁운동의 한 축을 담당했다면, 21세기 야학은 각 분야의 전문가와 지식인이 참여해 빈곤과 인권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환기하며 당사자들의 자존감을 회복시킨다. 활동의 주체와 내용 또한 대학생에서 지식인으로, 노동자를 일깨우고 조직하는 노동운동에서 거리로 내몰린 사람들(주민등록 말소자, 주거지 없이 거리를 떠도는 사람들)을 다시금 자기 삶의 주체로 일으켜 세우는 인권운동으로 변화하고 있다.

구조 바깥으로 튕겨 나간 사람을 다시 구조 안으로 끌어들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몇몇 개인의 열정과 선의, 강의 몇 번 듣게 하는 것으로 거둘 수 있는 성과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성찰을 통해 개인의 문제를 극복하려 몸부림쳐 본들 구조의 문제는 그대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는 구조적으로 빈곤 문제를 배태할 수밖에 없고, 그러한 구조적 모순을 끊어내기 위해서는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 졸저 ‘가난할 권리’를 통해 “가난한 사람도 사람답게 살 권리, 사람 대접받을 권리가 있다.”고 주장한 이유다.

빈곤에 대한 관점의 전환이 필요하다. 20세기를 주도했던 사회과학의 관점에서 보면 빈곤은 예산의 문제이자 비용의 문제였다. 그러나 21세기 들어 새롭게 주목받는 인문학의 관점에서 보면 빈곤은 비용이나 예산의 문제가 아니라 관계의 문제다. 노숙인은 방치하고 외면해도 그만인 타자가 아니라 동시대를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의 일원이며, 어떤 형식으로든 나와 관계가 있는 사람이다. 그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노숙인에게 다가가 곁이 되어주는 것, 그것이 바로 거리의 인문학이다.

거리의 인문학에는 부득불 예산이 필요하다. 강사에겐 강사비를 지급해야 하고, 변화를 모색하는 노숙인에겐 강의 외에도 다양한 지원이 필요하다. 선순환의 의미도 갖는다. 가난한 예술가에겐 일할 기회를 제공하고, 지식인에겐 사회적 책무와 역할의 확대라는 명분을 제공한다. 공공이 나서야 하는 이유다. 구조의 변화를 추구하는 만큼 구조적 접근이 필요한 것이다.

“지식인은 민중을 위해 살아야 한다.” 소설 ‘상록수’의 주인공 채영신의 지론이다. 거리의 인문학에 참여하는 지식인과 예술인은 ‘지금, 여기’를 살고 있는 ‘채영신들’이다. 그들에게 박수를 보내는 바다.

/최준영 (사)인문공동체 책고집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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