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품 애호가로서 심환지의 혜안
정선 필력에 대한 인정과 신뢰 커
생의 마지막을 함께한 ‘인왕제색도’
2021년 삼성가 품 떠나 국가에 기증
가치 알아보는 안목 가늠할 수 있어


‘무릇 물건은 항상 그것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돌아가므로 내가 진실로 그림을 좋아하여 이 그림을 얻었으나, 나를 이어서 이 그림을 사랑할 자로 후세에 또 어떤 이가 있을까’.
조선 후기 학자이자 정치가였던 심환지(沈煥之, 1730~1802)는 노년에 겸재(謙齋) 정선(鄭敾, 1676~1759)의 화첩을 얻고 자신처럼 미래의 누군가 역시 이 그림을 아껴주기를 바라며 이렇게 글을 남겼다. 영조와 정조 두 임금을 모셨던 그는 40대 초반 비교적 늦은 나이에 벼슬길에 들어섰으나 누구보다도 권력의 정점에 있었다. 강경한 노선을 걸었던 탓에 항상 정조와 대척한 인물로 알려졌지만, 정조어찰이 발견되면서 두 사람이 편지를 오가며 정치적 상생을 도모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여기에 더해 최근 심환지에 대해 새롭게 알려진 한 가지가 더 있다. 앞서 소개한 글이 암시하듯이, 그가 우리 산천을 화폭에 담은 진경산수화의 선구자였던 정선을 비롯해 후손들과 교유했고 그의 그림을 진정으로 아꼈던 미술품 애호가였다는 사실이 그것이다.
청송심씨 심환지의 집안은 대대로 유명한 서예가와 문장가를 배출했던 만큼 문화적 토양이 두터웠고 덕분에 그는 집안에 전해오던 많은 서화가들의 작품을 보며 감식안을 키울 수 있었다. 그림을 보는 혜안은 그가 관직에 복귀해 경기도 용인에서 서울 인왕산 아래 삼청동으로 이주한 1787년 이후 더욱 빛을 발했다. 심환지는 젊어서 한때 삼청동에 살았기 때문에 같은 동네에 살던 정선과 안면이 있었다. 훗날 정선을 두고 ‘우리나라 화가들의 스승(東國畵家之祖師)’이라고 칭송했다든지, 금강산 여행을 가면서 아들에게 집에 있는 정선의 금강산 그림을 확인해 달라고 부탁한 예는 정선의 필력에 대한 인정과 신뢰가 대단히 컸음을 말해준다.
그런데 심환지가 다시 삼청동으로 돌아왔을 때 정선은 이미 오래전에 죽고 없었다. 그는 정선의 아들 정만수(鄭萬遂, 1710~1795)와 손자 정황(鄭榥, 1735~1800)을 통해 선대의 인연을 이어 나갔다. 할아버지를 따라 화가가 된 정황은 간혹 심환지에게 정선 그림을 선물로 주었으며 그중에는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가 포함되어 있었다. 정선이 76세였던 1751년에 그린 이 작품은 비 온 뒤 은은히 구름을 머금고 있는 인왕산의 신비로운 모습을 옅거나 짙은 먹으로 과감하게 표현한 것이 특징으로, 가로 138㎝에 해당하는 비교적 큰 그림이다. 지금은 대중들 사이에서 고(故) 삼성 이건희 회장 컬렉션의 대표작으로 유명하지만 그보다 훨씬 오래전, 심환지가 큰 가리개로 정성 들여 꾸며 집안의 사당에 간직했던 애장품이었다는 사실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그는 ‘인왕제색도’를 감탄하며 보고 또 보며 무한한 애정을 보내지 않았을까. 이를 증명하듯 심환지는 1802년 이 그림에 대한 마지막 감상평을 남기고 그해 가을 세상과 작별했다.
심환지가 생의 마지막을 함께한 ‘인왕제색도’는 언젠가 청송심씨 문중에서 흘러나와 유랑의 세월을 보내게 된다. 1930~50년대 동안에는 서울과 개성의 골동품 애호가들의 소장품이 되기도 했고 우리나라 최초의 미술사학자 고유섭 선생도 이 그림을 보았다고 한다. 이어서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를 소장했던 서예가 손재형(1902~1981)의 손을 거친 후 삼성가의 수중으로 들어갔으니, 지금까지 설명한 내용이 ‘인왕제색도’가 이건희 컬렉션에 포함되기까지의 내력이다.
‘인왕제색도’는 2021년 삼성가의 품을 떠나 영구적으로 국가에 기증됨으로써 200년 넘은 여정에 드디어 마침표를 찍었다. 후대에 많은 사람들이 정선의 그림을 사랑하게 되었으니, 심환지의 소원은 이루어진 것으로 봐도 무방할는지 모르겠다. 그가 소장했던 그림 중 오늘날 국보로 지정된 것이 1점(인왕제색도), 보물로 지정된 것이 2점(정선, 심사정 그림 각 한 점)이다. 언뜻 보면 적은 수량이지만 하나를 모으더라도 귀중한 가치가 있는 물건을 모으기를 강조한 옛사람의 교훈을 되새긴다면 정선의 그림 중 최고이자 최선을 알아본 심환지의 안목을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황정연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미술사 조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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