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5년 입국 개항장 일대 ‘선교의 꽃’
제물량로 1.8㎞ 구간에 지정
한양에 낸 교실 ‘배재학당’ 간판
한국 최초 감리교회 설립 주도
교육·문화운동의 중심지 역할
19세기 말 조선은 혼란스러웠다. 나라가 크게 바뀌고 있었다. 선진 문물이 물밀듯 들어오고 구시대적 문화는 하나둘 지워져갔다.
1876년 조선은 일본과 ‘강화도조약’을 체결하고 인천, 원산, 부산을 개항했다. 조선은 개항지에 있는 일본인을 처벌할 수 없었고, 해안 측량을 허용해 일본이 군함을 수시로 파견할 수 있게 되는 등 불평등한 조약이었지만, 처음 나라의 문을 연 계기가 되기도 했다. 이후 조선은 미국, 청, 영국, 독일, 러시아, 프랑스와도 잇따라 비슷한 내용의 통상 조약 등을 체결했다.

이런 혼란 속 인천에 많은 외국인이 입국했다. 미국인 선교사 아펜젤러(Henry Gerhard Appenzeller·1858~1902) 역시 1885년 제물포(인천항)를 통해 입국해 경성과 인천 등지에서 선교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입국 후 한양에 조그마한 교실을 만들었다. 고종은 이 교실에 인재를 배양하는 ‘배재학당’이라는 간판을 내려주었다.
배재학당에서는 주로 기독교정신과 영어를 비롯한 인문·사회·자연과학 등 근대 교육의 교과목을 가르쳤다. 또 독립신문을 창간한 서재필의 배재학당 강의를 들은 학생들을 중심으로 ‘협성회’가 1896년 조직된다. 협성회는 사회운동단체로 성장해 자주독립 정신을 사회에 확산시켰다.
이곳은 인재 양성뿐만 아니라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산실이기도 하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에 나섰던 이승만, 주시경, 지청천, 여운형 등이 배재학당에서 수학했다.

아펜젤러는 한국 최초의 감리교회인 인천 제물포교회(현 내리교회) 설립도 주도했다. 이 교회는 당시 인천과 강화, 연안, 해주지역 선교의 거점이 됐고, 인천지역의 교육·사회·문화운동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인천 중구는 이런 아펜젤러의 업적을 기리고자 최근 제물량로 일대를 ‘1885아펜젤러선교길’로 지정했다. 구간은 약 1.8㎞로 아펜젤러가 제물포항으로 입국한 뒤 개항장 일대에서 머물며 선교 활동을 한 지역을 중심으로 지정했다.
아펜젤러가 한국에 첫발을 내디딘 한국기독교100주년기념탑(항동1가 5-39번지)부터 아펜젤러가 설립한 내리교회(내동 29번지)까지 이어진다.
/변민철기자 bmc0502@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