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대에 대한 극단적 혐오가 팽배

왜란전 日파견 동인·남인 떠올려

당파적 대립에 백성이 참변 고통

조용히 지켜보는 대다수는 걱정

냉정히 돌아보고 치유시간 필요

김영호 성공회대 석좌교수
김영호 성공회대 석좌교수

최근의 정치 상황을 보면 ‘보수와 진보’라는 이념적 프레임 시각에 따라 ‘극우’, ‘극좌’라는 말까지 난무하고 이러한 용어들을 언론에서도 여과 없이 사용하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냉정하게 생각해 보면 한국 사회가 직면한 지금의 정치적 혼란과 갈등이 이러한 보수-진보의 이념적 대립에 의한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든다.

전통적인 진보의 가치는 사회 개혁과 평등 및 변화와 혁신을 바탕으로 하고, 보수의 가치는 기존 질서의 유지와 점진적 변화를 중시하면서 상호 견제와 타협 속에서 발전해 왔다. 특히 한국의 진보세력은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노동과 복지제도에 관심을 가졌으며, 보수 세력은 자유시장경제와 안보 중심의 정책을 강조해 왔다. 1980년대 민주주의 이행 과정에서는 권위주의적 정부와 민주화 세력을 축으로 대립과 견제 속에서 상호 발전해 왔다. 지금도 한국의 보수라고 하면 종종 국가주의와 연결되었고, 진보는 민주화와 시민 사회의 발전 추구라는 관점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 중론이다.

그러나 지난해 말 대통령 탄핵 이후 극단적 길거리 정치 모습을 보면 이것이 보수-진보의 문제인지 의아하다. 상대방에 대한 극단적 혐오가 팽배한 가운데 대화는커녕 오직 타도의 대상만 남았다.

이런 모습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 일본의 조선 침략이 우려되어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파견된 정사(正使) 동인 출신 황윤길과 부사(副使) 남인 계열 김성일을 떠올리게 한다. 이들은 1년 동안 일본에 머물면서도 서로 반목하며 돌아와 일본의 전쟁 준비에 대해 상반된 입장을 보고했다. 결국 이러한 당파적 대립은 수많은 백성이 왜란의 참변을 겪는 고통을 감내하게 했다.

놀라운 것은 오늘날에도 별반 다르지 않다는 점이다. 지금 국회의 모습을 보면 국민을 외면한 짬짜미 당쟁을 벌이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든다. 이들은 오직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 국민을 길거리 정치에 악용하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프랑스의 사회심리학자인 구스타브 르봉(Gustave Le Bon, 1841~1931)이 ‘군중 심리학’(1895)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군중 속에서 개인의 자아가 사라지고 집단적 광풍에 휩쓸리면서 비이성적이며 충동적인 행동이 촉진된다는 경고가 지금 우리의 현실이 된 것이다.

대부분 조용히 지켜보는 국민의 입장에서는 걱정거리가 태산이다. 이러한 정치의 극단적 양극화가 몰고 올 피해가 고스란히 국민에게 돌아온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정치적 마비 상태는 시급한 국가 개혁 과제를 방치할 수밖에 없으며 한국 경제의 대외 경쟁력 악화를 야기하면서 정치적 증오만 남긴다.

솔직히 말하면, 정치권의 싸움은 진절머리가 난다. 이것이 과연 국민을 위한 것인가. 이는 그냥 보수와 진보의 가면을 쓴 당파 싸움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이런 상태로 우리가 직면한 수많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은 어불성설(語不成說)이다. 인공 지능(AI)의 시대, 어쩌면 당신들 없이 그냥 ‘AI-Democracy’(인공 지능이 주도하는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것이 더 좋은 선택일지도 모르겠다.

이제는 냉정하게 돌아보자. 그리고 서로 간 치유의 시간이 필요하다. 폭주하는 기관차에서 내려서 주변을 둘러볼 때다. 자기 성찰이 필요한 시기이다. 남의 티를 보기 전에 자신의 들보를 먼저 들여다봐야 한다. 분노, 미움, 불화로 점철된 정치적 한랭기(寒冷期)에서 이제는 국가의 미래를 위해 상호 퇴로를 찾아야 한다.

헌법재판소에서 대통령 탄핵의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그것은 분명 모두에게 만족한 결과가 아닐 것이다. 그러나 ‘권고에는 사랑을, 징계에는 온유가, 판결에서 정의가, 선언에는 자유’가 있기를 바란다. 도도히 흐르는 한강을 보수와 진보로, 혹은 당쟁으로 두 쪽 낼 수 없다. 그러나 한 번 망한 국가의 운명은 쉽게 회복하기 힘들다는 것이 역사의 교훈이며 진실이다.

/김영호 성공회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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