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는 ‘앞으로 나란히’ 아냐… 韓日 최악 시기에도 민간교류 활발”

자신이 쓴 책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정미애 제15대 주니가타 대한민국 총영사. /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
자신이 쓴 책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정미애 제15대 주니가타 대한민국 총영사. /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

인천에서 직항 비행기를 타고 2시간 정도 이동하면 일본 서북부 니가타공항에 도착한다. 한국에 잘 알려지지 않은 지역이지만, 니가타현을 비롯한 4개 현을 관할하는 공관이 1978년 개설돼 교민을 보호하고, 한일 교류를 이어가고 있다.

2017년 제15대 주니가타 대한민국 총영사로 정미애 박사(국제정치경제학)가 공관장으로 부임했다. 인천에서 자라 ‘일본정치학자’로 성장한 그는 여성 첫 주니가타 총영사로 약 3년간 활동했다. 마흔여덟 번째 아임프롬인천 초대손님으로 정미애 전 총영사를 만났다.

■ 최악의 한일 관계 속 꽃핀 민간 교류

일본 유학 경험, 2017년 니가타 총영사로

불매운동 시기… 양국 ‘오해 풀기’ 노력

“한국 시민의식 성숙, 지역교류로 우호”

현지서 한가위 축제… 가득 메운 시민들

현재 전 세계에 설치된 재외공관(대사관, 총영사관, 대표부 등)은 173개다. 이중 일본에는 주일본대사관 외 고베· 나고야·니가타·삿포로·센다이·오사카·요코하마·히로시마·후쿠오카 등 9개 지역에 총영사관이 있다.

일본 니가타현

주니가타 총영사관은 니가타현, 나가노현, 이시카와현, 도야마현을 관할한다. 이곳에 우리 국민 약 6천명이 거주한다.

정미애 전 총영사는 박근혜 정부의 ‘한일 위안부 합의’(2015)가 이루어지고 딱 2년 째가 되던 해인 2017년 12월28일 공관장으로 부임해 2020년 11월 임기를 마쳤다. 국내에서 ‘일본 불매운동’이 확산되며 한일 관계가 최악으로 치닫던 시기에 공관장을 지냈지만 그는 “일본 현지에서 양 국민 민간 교류는 활발히 이루어졌다”고 자신있게 말했다.

정 전 총영사는 일본 정치·문화에 박식한 전문가인 데다가 일본어를 현지인처럼 구사했다. 언론사 인터뷰와 대학·단체 강연 요청이 이어졌다. 일본 유학시절 일본 내 로터리 클럽 장학생이었던 일화가 알려지면서 일본 각 지역 로터리 클럽에서 환영의 뜻을 전하기도 했다.

2018년 아사히TV 대담에 출연한 정미애 총영사가 “니가타는 한반도로 통하는 관문”이라고 말하고 있는 장면. /정미애 제공
2018년 아사히TV 대담에 출연한 정미애 총영사가 “니가타는 한반도로 통하는 관문”이라고 말하고 있는 장면. /정미애 제공

2018년 10월 한국 대법원은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피해자가 일본제철을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소송에서 1억원씩 배상하라고 판결을 확정짓는다. 일본 정부는 2019년 7월 반도체 소재 3개 품목에 수출 규제를 결정하고, 이어 통관 절차 간소화 혜택을 주는 ‘화이트리스트’에서 한국을 제외시키는 결정을 내렸다. 한국 시민사회에선 일본을 방문하지 않고 일본 브랜드 제품을 구매하지 않는 ‘노 재팬’(No Japan) 운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정 전 총영사는 당시 강연에 나설 때마다 양국 간 쌓인 오해를 풀기 위해 노력했다고 한다. 서울 중구청이 ‘노 재팬’이라고 쓰인 깃발을 서울 도심에 내걸었는데 “민간이 자발적으로 진행하는 불매운동을 지방자치단체가 조장하면 안 된다”는 취지의 반대가 커지자 깃발이 철거된 적이 있다. 이 같은 일화를 강연에서 소개하며 한국의 시민의식을 일본사회에 전하기도 했다.

정 전 총영사는 2019년 공관 주최로 열린 ‘한일 한가위 축제 in 니가타’ 행사를 잊지 못한다. 매년 공관이 주최하는 민간교류 행사였는데, 국내 공연단체들이 한일 관계 악화를 이유로 이 행사에 참석하는 것을 꺼렸다. 이 행사를 앞두고 지역신문 ‘니가타일보’(新潟日報)와 진행한 인터뷰에서 정 전 총영사는 “한일 관계가 최악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한국 시민들의 성숙한 의식이 있고, 민간 교류는 끊기지 않았다. 양국 관계가 나쁘면 얻는 것은 아무것도 없지만 관계가 좋아서 얻을 수 있는 이익은 무한하다. 한일 관계가 우려되는 상황에서 행사 개최이지만, ‘지역 교류로 이어지는 한일 우호’를 참가자 전원과 나누는 기회로 삼고 싶다.”

니가타일보(新潟日報) 2019년9월5일자에 게재된 정미애 총영사 인터뷰 기사. /정미애 제공
니가타일보(新潟日報) 2019년9월5일자에 게재된 정미애 총영사 인터뷰 기사. /정미애 제공

인터뷰 기사가 나가고 일주일 뒤 니가타 일보에는 스도(74)씨가 보낸 독자 투고가 실린다.

“오랫동안 기다려온 정보를 접한 기분이 들었다. 강제징용 문제나 지소미아 파기 등을 둘러싸고 TV나 잡지에서 ‘혐한’ ‘한일 단절’이라는 보도가 점점 심해지는 것에 싫증이 나 있던 터라 총영사의 미소가 담긴 사진이 기뻤다. 이제 우리 니가타 시민들의 차례가 왔다는 생각이다. 이웃 나라 국민들과 친밀하고 평화롭게 살아가기 위해서 지금이야말로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이 노력과 지혜를 모아 풀뿌리 교류를 깊게 할 때다.”

니가타일보(新潟日報) 2019년9월11일자에 실린 정미애 총영사 인터뷰에 대한 독자투고 기사. /정미애 제공
니가타일보(新潟日報) 2019년9월11일자에 실린 정미애 총영사 인터뷰에 대한 독자투고 기사. /정미애 제공

니가타에서 가장 큰 ‘류토피아 콘서트홀’이 텅 빌까 걱정이 많았지만 행사장에 1천300여명이 찾아오며 성공했다. 대기 줄이 콘서트홀 밖까지 이어져 객석을 추가로 마련해야 했을 정도였다. 의정부시립무용단의 전통무용, 세종대왕 한글 창제를 주제로 한 뮤지컬, 니가타 학생들의 K팝 공연, 태권도 시범 공연 등이 진행됐다.

2019년 주니가타대한민국총영사관에서 개최한 ‘한가위축제 in 니가타’ 행사에서 정미애 총영사. /정미애 제공
2019년 주니가타대한민국총영사관에서 개최한 ‘한가위축제 in 니가타’ 행사에서 정미애 총영사. /정미애 제공
2019년 주니가타 대한민국 총영사관에서 개최한 ‘한가위축제 in 니가타’ 행사장을 가득 메운 시민들. /정미애 제공
2019년 주니가타 대한민국 총영사관에서 개최한 ‘한가위축제 in 니가타’ 행사장을 가득 메운 시민들. /정미애 제공

정 전 총영사는 양국 지자체 간 청소년 교류에도 힘을 보탰다. 니가타현 미나미우오누마시에 있는 시오자와 중학교와 강원 평창군 대관령고등학교는 30여년 간 교류를 이어왔다. 정 전 총영사는 ‘다카마도노미야 기념 일한교류기금’에 두 학교의 교류 사례에 대한 추천서를 보냈다. 그 결과 2018년 ‘우수한 청소년·풀뿌리 교류 사례’로 표창이 이루어졌고, 이듬해부터는 미나미우오누마시 전체에서 교류 희망자를 선발하게 됐다.

“총영사 임기를 마치고 국립외교원에서 강연을 한 적 있어요. 강연을 마치고 김상준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가 토론을 맡았는데 저의 이런 성과에 대해서 외무고시 출신의 직업 외교관이 아닌 민간인, 또 남성이 아닌 여성, 대사관이 아닌 총영사관에서 이뤄낸 외교적 성과다. 이런 의미에서 ‘메인스트림’이 아닌 ‘마이너 필드’에서 좋은 성과를 이뤄냈다는 평을 내리기도 했습니다.”

2019년 한국 방문을 앞둔 미나미우오누마시 청소년들과 간담회를 진행하는 정미애 총영사. /정미애 제공
2019년 한국 방문을 앞둔 미나미우오누마시 청소년들과 간담회를 진행하는 정미애 총영사. /정미애 제공

■ ‘마이너리티’ 일본 정치 연구의 시작

일본 정치를 전공한 정미애 전 총영사는 미국 중심의 한국 정치학계에서 ‘마이너리티’로 통한다.

1985년 이화여대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한 정 총영사는 학년이 올라가면서 정치학자가 되겠다는 마음을 굳혔다. ‘한국정치론’을 가장 좋아했던 그는 진덕규 교수 강의에 매료돼 정치학 연구를 더 해봐야겠다고 생각했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 과정을 밟았다. 석사 논문은 ‘미군정 하에서 토지 개혁’을 주제로 썼다.

이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일본 정치학계에서 ‘이익집단 연구’ 권위자인 츠지나카 유타카 교수가 있는 츠쿠바 대학으로 유학을 결정했다.

일본 대학에서는 연구생 제도가 있다. 연구생은 교수의 수업과 세미나에 참석하고, 언어 교육 등을 거쳐 준비도에 따라 2년 안에 입학시험에 응시할 수 있는 기회를 얻어야 한다. 2년 안에 입학 시험에 합격하지 못하면 귀국해야 한다. 6개월 만에 입학시험을 치르고 석사 과정을 시작한 정 전 총영사는 같은 학교에서 박사 학위까지 마쳤다.

정미애 제15대 주니가타대한민국총영사. 2025.3.19 /김용국기자yong@kyeongin.com
정미애 제15대 주니가타대한민국총영사. 2025.3.19 /김용국기자yong@kyeongin.com

정 전 총영사의 세부 전공은 ‘이익집단론과 정책 과정’이다. 시민사회가 정치와 정책에 미치는 영향력을 분석해 왔다. 이 연구 주제는 점차 한일관계에서 시민·지자체 교류, 공공외교 등으로 분야가 확장되고 있다. 정 전 총영사는 다양성과 다원성이 인정되는 사회를 진정한 민주주의 사회로 본다.

■ “정치학은 실천하는 학문”

“정치학은 반드시 현실과 접목돼야”

여성·다문화 관련 시민단체 활동 활발

귀밑 1㎝ 두발 제한 등 엄격한 중학시절

“주입 규율이 자유 구속, 대학서 깨달아”

“정치학이 다른 학문과 다른 점은 반드시 현실과 학문이 접목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정치학자로서 실천이 따라야하고요. ”

한국으로 돌아와 성공회대 사회문화연구원, 국민대 일본학연구소 연구교수 등을 지내면서도 시민단체 활동을 놓지 않았다. 여성정치세력민주연대에서 ‘여성 할당제 도입’ 등 운동에 참여했고, 서울시 다문화가족지원협의회 위원으로 활동했다. 정치학은 실천하는 학문이라는 신념을 따른 것이다. 그가 다원주의를 중시하는, ‘실천주의 정치학자’가 된 배경은 무엇일까. 인천에서 보낸 유년 시절을 거슬러 올라가 봤다.

■ ‘줄 맞춰 앞으로 나란히’ 민주주의를 깨닫다

“말띠 여성에 대한 속설이 늘 따라다녔어요. 학교에서 무슨 사고만 나면 우리 학년이 저질렀을 거라는 얘기를 자주 듣곤 했죠.”

‘말띠 여자는 팔자가 드세다’는 속설을 그 시절 여학교에 다니던 학생들은 흔히 들을 수 있었다. 충남 서산에서 출생한 정 전 총영사가 세살이 되던 해 그의 가족은 인천에 터를 잡았다. 그 시절엔 실제 나이와 호적 나이가 다른 일이 흔했다. 그의 아버지는 1966년생 말띠인 그를 1968년생으로 출생신고했다. 본래 나이로 인천송림초에 입학했고 인화여중, 인천여고에서 학창 시절을 보냈다.

옛 인천여고
옛 인천여고

‘전쟁영웅’과 ‘친일파’라는 엇갈린 평가를 받는 백선엽(1920~2020) 장군의 동생인 백인엽(1923~2013) 장군이 1958년 인천 사학재단 성광학원을 인수해 설립한 선인학원이 인화여중을 운영했다.

인화여중 학생들은 군대처럼 엄격한 규율을 따라야 했다. 항상 두발은 ‘귀밑 1㎝’를 유지해야 했고, 학교에선 학생들의 머리카락을 자로 재며 이를 단속했다. 운동장에서 조회를 할 때면 수십 번씩 ‘앞으로 나란히’로 간격을 맞추며 줄을 맞추기 위해 공을 들여야 했다.

“민주주의는 광장에서 탄생했고, 그 광장에선 사실 줄을 맞출 필요가 없고 자유롭게 서서 민주주의가 이루어지죠. ‘우리에게 주입시켰던 규율과 교육에 의해 우리의 자유와 권리가 구속된 것이었구나’ 대학교 들어가서 민주주의를 배우면서 이런 깨달음을 얻었죠.”

인천여고는 인화여중과 달리 자유로운 분위기였다. 교복·두발 자유화가 정착하는 시기였다. 정 전 총영사는 인천여고 학생회장을 맡아 조회 시간마다 수백명 학생들 앞에 대표로 나섰다.

고등학교 2학년 때는 고교 연합서클 ‘나사렛’ 활동으로 많은 시간을 보냈다. 매주 토요일 인천여고·제물포고 학생들이 모인 독서 동아리였다. 정 전 총영사는 나사렛 12기로 제물포고 출신인 박문희 코오롱글로벌 부사장과 동기였다. ‘적과 흑’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등 다양한 고전과 소설을 읽으며 일년 동안 활동한 내용을 문집으로 엮었다. 손으로 쓴 글과 그림을 복사해 제작했다.

인천여고 제물포고 연합서클 나사렛(N.Z.R) 문집에 실린 만평. 학생의 본분과 연합서클 활동을 두고 고민했던 당시 상황이 녹아 있다. /정미애 제공
인천여고 제물포고 연합서클 나사렛(N.Z.R) 문집에 실린 만평. 학생의 본분과 연합서클 활동을 두고 고민했던 당시 상황이 녹아 있다. /정미애 제공

■ 풍요로운 나의 고향 ‘인천’

“잠재력 풍부한 인천, 자부심을 가질만해

국제도시로 발전 가능성 충분히 있어”

“인천은 지금의 나를 있게 한 곳입니다. 인천에서 보낸 시절은 선생님들의 사랑을 받고, 즐거운 학교 생활을 하면서 자신감 넘치고 풍요로운 시기였어요.”

인천 동구에 살던 정 전 총영사는 초등학교 졸업이 가까워질 때쯤 중구 내동으로 이사했다. 당시 자유공원 아래 동네는 중산층 가정의 개인 주택들이 위치해 있었다. 이후 부평현대아파트가 들어설 때 그 곳으로 이사하면서 대단지 아파트 생활을 시작했다. 산곡동에 현대백화점 부평점이 문을 연 게 1992년이었다. 당시 부평은 여유와 풍요로움이 가득한 번화가였다.

“인천은 잠재력과 성장 가능성이 많은 도시라고 생각해요. 인천 사람이 자존심을 가질 수 있을 만한 도시이지만, 아직까지 그 잠재력이 충분히 발휘되지 못한 것 같아요. 인천은 국제적 도시로 발전할 수 있는 가능성이 충분한 도시라고 봅니다.”

정 전 총영사는 올해 새학기부터 광운대 국제학부 초빙교수를 맡았다.

“정치학자로서 전공과 관련한 연구·교육을 하면서 전문성을 살린 사회 활동을 이어나가려고 합니다. 또 총영사 시절부터 실천해 왔던 양국 간 민간 교류를 대학 현장에서 실현시키기 위한 방법들을 찾아보고 있습니다.”

/백효은기자 100@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