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아이와 함께 찾는 추억의 장소
몰래 드나들며 만화가 꿈 키워와
우아하고 싶어 택한 소설가의 길
지금 생각해보면 참 바보같은 일
좋아했던 옛 만화들 다시 찾고파


딸아이는 이제 열한 살이다. 초등학교 4학년. 부릉부릉 사춘기 시동을 거는 중이라 여간 새초롬한 게 아니다. 일 이년 더 지난다면 아마 말 붙이기도 어렵겠지. 제 방문 쾅 닫고 처박히는 일이 일상이 될 것이다. 그나마 아직은 “엄마랑 어디 좀 갈래?” 할 때 주섬주섬 따라 나오니 다행이랄 밖에. 그래서 나는 종종 딸아이와 만화방엘 간다. 서너 시간 놀다 오는데 5·6만원은 순식간에 쓴다. 만화방 이용료뿐 아니라 음료값, 간식값 등이 만만찮기 때문이다. 그래도 작은 골방 같은 곳에 들어앉아 각자 좋아하는 만화책 보는 재미란 정말 쏠쏠하다.
나는 어릴 적 만화방에 참새처럼 드나들었다. 물론 그때야 ‘몰래몰래’였다. 들켰다가는 당장 엄마가 현관에 세워뒀던 빗자루를 움켜쥐고 달려올 일이었다. 만화는 모름지기 숨어서 보는 거였다. 그래서 더 달콤하고 재미났을까. 만화방에 앉아서 보면 50원, 집에 빌려 가면 150원. 일주일 용돈으로 받은 동전들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가만히 세어 보던 어린 날은 지금 떠올려도 우습고 귀엽다. 나의 만화방 순례는 일곱 살 때부터 이어졌다. 동네 구멍가게 한편에 마련된 만화 코너를 들락거리다 한참 자랐을 땐 컵라면도 먹을 수 있는 만화방이 생겼고, 대학에 진학했을 땐 동네마다 도서대여점이 생겼다. ‘로봇 찌빠’부터 ‘캔디 캔디’, ‘갈채’, ‘빅토리 비키’까지 나를 열광하게 했던 만화는 숱했다.
그래서 내 꿈은 만화가였다. 내가 써본 첫 팬레터는 ‘아슬아슬 발명왕’과 ‘맹꽁이 서당’을 쓴 윤승운 선생님 앞이었다. 내용이 기억나지 않는다는 건 퍽 아쉽다. 쓰다 만 팬레터를 엄마의 빨간 자개 화장대 서랍 아래에 숨겨두었다가 걸린 적도 있었다. 일곱 살짜리 딸이 애절하게 쓴 팬레터를 본 엄마는 기가 막혀 웃지도 못했다. “아니, 얘는 커서 뭐가 되려고 이래?” 어쨌거나 나는 만화가가 되고 싶어 연습장에다 자를 대고 칸을 그린 다음 만화를 그렸다. 아무래도 만화가만큼 즐거운 직업은 없을 것만 같았다. 그 꿈을 접은 건 초등학교 3학년 때였다.
열살이 되었으니 나는 조금 우아해지고 싶었다. 십대면 응당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만화책은 읽을 때마다 꿀밤을 먹었지만 동화책은 밥상머리에서 읽어도 착하다 칭찬을 받았다. 그런 대접을 받았으니 만화가가 우아하지 않다고 생각할 만도 했다. 그래서 나는 소설가가 되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소설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지는 못했지만 어쨌거나 우아한 것이라고 생각했고 이후 별 부침 없이 나는 소설가가 되었다. 지금 생각하면 바보 같은 일이었다. 기어이 만화가가 되었어야지. 요즘 웹툰 작가가 얼마나 인기 직업이냐고.
“원래 엄마들은 만화책 막 못 보게 하고 그러는 거 아냐? 엄마는 왜 자꾸 만화방엘 가재?” 딸은 종종 내게 묻는다. 그럴 때면 나는 무심히 대답한다. “재밌잖아.” 그것만큼 절실한 이유가 또 있을까. 재미가 있다는데, 더 무얼 따지겠는가 말이다. 만화책 본다고 혼을 내는 딸아이 친구들의 엄마는 아마 어릴 적 만화책을 제대로 본 적 없는 사람일 것이다. 나처럼 끝끝내 옷 속에 숨겨 와 다락방에 올라가 읽거나 놀이터 미끄럼틀 아래 그늘에 앉아 마지막 장까지 가는 걸 아까워하며 읽어본 적이 없을 것이다. 그랬다면 지금도 아이 손 덥석 붙잡고 “엄마랑 만화방 가자”하는 어른으로 컸을 텐데.
내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줄줄 빨며 눈이 빨개지도록 역사 만화를 보는 동안 딸아이는 고양이나 강아지가 나오는 만화를 본다. 배는 왜 그렇게 자주 고픈지 추러스나 떡볶이를 주문하고, 쿠션은 하도 폭신해 때때로 졸기도 한다. 내가 좋아했던 만화들은 왜 재출간이 되지 않는 걸까? 김동화와 한승원, 이미나와 천계영의 만화들은 다 어디 갔을까? 오늘은 당근마켓을 좀 뒤져봐야겠다. 운이 좋으면 그들의 만화를 한가득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 웃돈을 주고라도 살 만하지, 아무렴. 딸아이는 벌써 하품을 한다. 안 되는데. 나는 아직 두 권쯤 더 읽어야 하는데.
/김서령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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