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며 겨자 먹기’로 떠맡게된 수업
철학자 탐구하다 ‘소크라테스’까지
청년 타락이란 죄목으로 유죄 판결
‘입증된 바 없다’며 스스로 택한 죽음
삶의 아이러니는 ‘쓴 웃음’의 미학

그 금요일은 수업이 두 개나 있는 날이었다. 날이 갈수록 수업이 어렵게 느껴지기 때문에 전날부터 준비에 공을 들여야 했다. 세월이 베풀어 준 가르침일 수도 있다. ‘웃음의 이해’는 제목은 아주 유쾌해 보이지만 수업을 끌어가는 사람 입장에서 결코 즐겁게 웃을 수가 없다. 도대체 웃음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웃음은 ‘실행적’으로 웃는 것이 이해하는 것보다 더 좋다. 삶에는 이렇듯 아이러니가 있다. 원치 않는 상황에 처한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것. 절대 원망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 ‘웃음의 이해’는 학생들이 제안한 강좌였다. 나는 그것을 맡을 다른 사람이 없어 ‘울며 겨자 먹기’로 몇 년 전에 떠맡은 것이었다. 하지만 그럼으로써 또 배움이 있고 경험은 축적된다.
이제 웃음 철학자들을 다루어야 할 순서인데, 그러려면 어렵게 내가 먼저 배워야 한다. 만프레드 가이어는 서양철학사를 웃음이라는 키워드로 꿰뚫어 보일 수 있는 큰 학자다. 국문학자이면서도 서양사 속의 ‘웃음의 철학’을 가득히 설명해 그의 책을 먼저 숙독한다. 이 또한 하나의 아이러니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서양 철학의 많은 주제들에서 그렇듯이 웃음에 대해서도 플라톤이 맨 앞자리에 온다. 그런데 기묘하다. 그는 웃음을 철학에서 추방하고자 한 자로서 웃음 철학사의 맨 앞자리를 차지한다. 이 점에서 플라톤은 자신의 제자와도 달랐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적절한’ 웃음을 나쁘게 여기지 않았건만, 스승인 플라톤은 진정한 철학자는 웃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진정하려면 진지해야 했다. 며칠 지난 지금의 기억에 따르면, 만프레드 가이어는, 아마도 플라톤은 그 자신이 사력을 다해 지키고자 한 스승의 죽음에서 커다란 충격을 받았으리라고 했다. 그 스승이란 물론 소크라테스다. 나는 다시 한 번 ‘울며 겨자 먹기’로 소크라테스 쪽도 서둘러 살피지 않을 수 없다.
바야흐로, 소크라테스가 아테네 법정에 소환되어 죽음을 맞이한 때는 그의 나이 일흔 살 언저리다. 뮐레토스, 아뉘토스 등의 무리들에 의해 소크라테스는 국가가 섬기는 신을 부정하고 다른 신을 섬기며, 잘못된 가르침으로 청년들을 타락시킨다는 죄목으로 기소된다. 당시 아테네에서는 기소한 자가 법정에서 증인으로도 발언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 소크라테스 재판의 배심원은 501명이나 되었는데 281대 220으로 유죄 판결이 나고 만다. 당시 재판에서는 2차 회의에서 형량을 결정했다. 그런데 소크라테스는 자신을 죄인으로 선고한 무리들과 전혀 타협하지 않으려 한다. 그는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았고 추방령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단지 은화 ‘1므나’만을 받아들이겠다고 한다. ‘므나’는 당시의 화폐 단위로, ‘1므나’는 노동자들이 100일 동안 일해야 벌 수 있는 돈이었다. 어떤 블로그에 따르면, 제자인 플라톤이 놀라서 법정에 ‘30므나’를 제시하고 그 보증을 약속했지만 이는 소크라테스를 기소한 자들이 원한 것은 아니었다고 한다. 소크라테스가 제시한 ‘1므나’는 법정 모독에 가까운 것이었고, 그렇다면, 소크라테스는 자신을 기소한 자들에게 구걸하는 대신에 죽음을 스스로 선택한 것이었다.
소크라테스의 재판에 대해서는 플라톤도 생생한 기록을 남겨 놓았다. 그러나 크세노폰이라는 철학자는 소크라테스 자신에 의한 죽음의 선택에 특별히 주목했다. 그는 재판이 종료되었을 때의 소크라테스를 기록으로 남겼다. 오유석 번역의, 크세노폰의 ‘소크라테스의 변론’에서다. “오! 사람들이여! 증인들로 하여금 위증하게 하고 나에 대해 거짓으로 진술하도록 가르친 자들 그리고 이런 자들에게 동조한 자들은, 마땅히 마음속에서 심대한 불경과 불의를 깨달아야 합니다. 반면 나로 말하자면, 내가 왜 유죄판결을 받기 전보다 지금 더 의기소침해야 합니까? 기소장에 기록된 내용들 중 어떤 것도 내가 저질렀다는 것이 입증된 바 없는데 말입니다.”
‘웃음의 이해’는 웃음을 이해하기 위한 수업인데, 나는 요즘 웃음을 잃었다. 아니다. 웃을 수 있다. 삶은 참 아이러니하기 때문이다. 아이러니는 ‘쓴웃음’의 미학이다.
/방민호 문학평론가·서울대 국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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