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형배 헌법 재판관이 읽은 尹 탄핵 판결문
‘민주 공화국 주권자인 대한국민 신임 배반’
가슴 울컥 먹먹… 나만의 일이 아니었을 것
꽃 피고 새 우는 우리나라… 봄이 찾아왔다

아침에 늦잠을 잤다. 이불 속에서 평소보다 오래 누워 있었다. 내가 이렇게 아침 이불 속에 누워 늑장을 부린 적이 없었는데, 일어나야겠다. 일곱시가 다 되었다. 거실로 나가 누워서 하는 스트레칭(내가 스스로 개발한 열서너가지)을 하였다. 몸 컨디션이 괜찮다. 스트레칭을 하고 창을 가린 블라인드를 올렸다. 햇살이 밝고 맑다. 물을 마시고 서재로 가기 위해 현관문을 열었다. 현관문 옆 샘물이 맑다. 며칠 전 봄비가 왔었다. 비가 오면 샘물이 맑아진다. 샘에는 샘 물길을 내주는 가재가 살고 찬물에서만 서식하는 옴개구리(이 개구리가 옴개구리인지 정확하게 모르겠다)가 산다. 비가 오면 바위 틈에서 나와 노는 가제와 개구리는 아직 나오지 않았다. 때가 아닌 모양이다. 샘을 둘러싸고 있는 돌들과 샘 위 바위에는 이끼가 푸르다. 이끼를 자세히 보았는데, 이끼 꽃이 벌써 맺혀 있다. 우리 집 샘가에 커다란 바위가 하나 있고, 그 바위에는 사시사철 이끼가 산다. 이끼는 겨울철에도 물기만 있으면 눈 속에서도 푸르다. 바위 바로 위에 아주 작은 조팝나무 한 그루를 가꾸고 있는데, 그 조팝나무 작은 실가지를 뚫고 돋아나 있던 잎눈이 푸른 잎 눈을 틔웠다. 금방 잎이 피고 그곳에서 바로 작은 꽃대들이 오복하게 솟아 금방 흰 꽃이 하나둘 셋 넷, 일일이 툭툭 터질 때, 아니 튀밥처럼 툭툭 튈 때, 나는 봄에 감격하고 감동한다. 이 조팝나무 온몸에 지는 햇살이라도 떨어지면, 오! 이런, 세상에 이런 일이, 이렇게 새롭고, 이렇게 신비롭고, 이렇게 생생한 감동이 또 어디 있단 말인가.
마당을 내려섰다. 작년 잔디는 노랗게 아주 눕고, 그 사이 사이에 작은 못 끝같이 생긴 푸른 새싹이 돋는다. 봄을 맞이하기 위해 새로 단장해 놓은 화단에는 며칠 전부터 수선화가 피어났다. 수선화는 노란색이다. 앵초 꽃이 피고 있다. 할미꽃, 돌 단풍 꽃은 진즉 피었다. 오늘 아침에는 드디어 봄맞이 꽃이 피어난다. 이 희고 작은 꽃잎이 다섯 장인, 이 똑똑한 꽃을 바라보고 있으면 눈이 시려서, 내 눈이 실눈이 된다. 무릎을 꿇어야 잘 보이는 흰 냉이 꽃도 곳곳에 피어났다. 물까치들이 아침을 먹기 위해 소리를 지르며 날아다닌다. 뒤 안에 작은 살구나무 꽃이 핀다. 빈집 샘가 앵두꽃이 피어난다. 집 뒷산에 심어 놓은 작은 벚나무 꽃이 피어나고, 마을 뒷산 400년이 넘었다는 느티나무와 마을 앞 200년 되었다는 느티나무와 50년 넘은 느티나무들은 연두색 불꽃이 터진다. 느티나무 세 그루는 해마다 마을의 새 역사를 쓰고 내게 새 시를 쓰게 하고, 새 정부를 세운다. 봄 비로 몸 단장을 한 까치는 흰 날개를 펼치고 난다. 딱새는 아직 짝을 찾지 못했는지, 전깃줄에 앉아 애타는 연정의 노래를 작곡하여 노래 부른다. 지금쯤 우리 마을을 향해 꾀꼬리와 파랑새와 호반새는 날아오고 있을 것이다.
나는 시를 써야지, 새와 바람과 논과 밭과 작은 벌레들과 오래된 농부들의 농사와 떠다니는 아침 구름과 저문 노을에 대해서, 달을 따라다니는 길을 따라 걸으며 시를 쓸 것이다. 나는 이유 없이 도도해지고 싶다. 명랑해지고 싶다. 그 어떤 바람이 불어와도 아첨하지 않고, 앞 산 푸른 소나무에 기죽지 않은 아름다운 시를 쓰겠다.
그날 그때, 문형배 헌법 재판관이 ‘대통령 윤석열 탄핵 판결문’을 읽어가다가 ‘민주 공화국의 주권자인 대한 국민의 신임을 중대하게 배반하였습니다’라는 판결문에서 ‘대한 국민’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가슴이 울컥 먹먹했던 것은 나만의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 판결문은 이 땅에 사는 우리 개개인의 삶과 이 땅에서 함께 살아가야 할 국가 공동운명체에 답하는 역사적 기록문이었고 훼손된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지켜내야 한다는 명문이었다.
꽃피고 새우는 우리나라, 우리 봄이 우리를 다시 찾아왔다. 우리 집 작은 한옥 처마 밑 기와 틈에 참새 한쌍이 짝을 짓고 새로 집을 짓느라 바쁘다. 나는 기쁘고, 나는 이 봄이 좋다. 저 참새 부부가 집 짓는 공사장으로 새참이라도 챙겨가서 이런저런 우리나라 봄을 이야기하며 같이 먹고 싶다.
/김용택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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