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 산불서 어르신 구한 청년들
지역 주민 아닌 인니 이주노동자
우린 그들을 이웃으로 인정했나
언제까지 무슬림 선을 그을 건가
기도 시간·공간은 위협 아닌 권리

2025년 봄, 영남 지역을 강타한 산불은 수많은 생명과 삶의 터전을 앗아갔다. 산림은 물론 주택, 농업시설, 국가유산 등이 소실되었다. 피해액도 복구 비용과 기간도 사상 유례가 없는 규모로 추산되고 있다. 그럼에도 피해 주민을 돕기 위한 손길이 이어지고 있고 성금도 답지하고 있다고 한다. 아픔은 크지만 그래도 이웃이 있다는 것이 희망이 되고 있다.
지난 3월 영남 지역의 산불 현장에서 한 장면이 국민의 마음을 따뜻하게 했다. 여러 미담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고향을 떠나 한국에 노동자로 이주해 들어온 청년들의 미담이었다. 그리고 그 청년들에게 미안함이 앞서는 것은 우리의 편견 때문이기도 했다.
짙은 연기와 불길 속에서 허리를 제대로 펴지 못하는 어르신을 등에 업고 달리는 청년들은 놀랍게도 지역의 주민이 아니었다. 인도네시아 국적의 선원인 ‘수기안토’와 ‘디피요’는 “할머니, 산에 불이 났어요”라고 소리치며 잠든 주민들을 깨우고 몸이 불편한 주민을 업고 방파제로 대피를 시켰다. ‘사푸트라’는 방파제에 모인 주민 30여 명을 보트에 태워 축산항으로 대피시켰다고 한다.
언론은 그들을 ‘영웅’이라 불렀고, 많은 국민이 박수를 보냈다. 그러나 이 장면이 던지는 물음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우리는 과연 그들을 일상 속 이웃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는가? 이 땅에서 땀 흘려 일하고 세금을 내며 살아가는 이주민들, 특히 이슬람교도 이웃들에 대해 우리는 진정 공정하고 따뜻한 시선을 갖고 있었던가?
기억해야 할 장면이 있다. 불과 몇 해 전 대구와 청주, 안산, 강원도 등지에서는 이슬람 사원 건립 반대 시위가 이어졌다. 일부 극단적 반대자들은 공사장 앞에 돼지머리를 걸어두거나 돼지고기를 굽는 퍼포먼스를 벌였다. 이슬람 신자들이 돼지를 부정한 존재로 보는 점을 조롱하려는 의도였다.
“우리 동네에 테러리스트들이 몰려온다”는 확인되지 않은 소문은 온라인에서 확산되었고, 무슬림 이주노동자들, 심지어 그 자녀들까지도 차별적 시선에 노출됐다. 그때도 그들은 별다른 항의조차 하지 않았다. 그저 고개를 숙인 채, 작은 기도 공간 하나를 허락받기 위해 묵묵히 기다렸다.
그리고 이번에는 말없이, 불길 속에서 사람을 구했다. 이주민이 우리를 도왔다는 사실이 뉴스가 되어야 하는 현실은 슬프고 아이러니하다. 그들은 오래전부터 이 땅에 있었고, 우리와 같은 마을에서 일하고, 살며, 웃고 울었다. 우리가 그들을 ‘우리’라고 부르지 않았을 뿐이다.
언제까지 우리는 ‘외국인’, ‘무슬림’, ‘다문화’라는 단어로 그들을 선 긋고 말할 것인가? 그들이 먼저 인간으로 다가왔을 때, 우리는 ‘안보’나 ‘문화 차이’라는 이유로 그들을 경계하지 않았는가?
한국 사회는 이미 다문화 사회다. 농촌, 어촌, 공단, 병원, 아파트 단지 등 삶의 거의 모든 공간에 이주민 이웃이 함께 살아가고 있다. 이들의 종교는 단지 신앙일 뿐이다. 기도의 시간과 공간은 사회적 위협이 아니라 헌법이 보장한 권리다.
우리가 보장해야 할 것은 그들의 침묵이 아니라 그들이 우리 곁에 있어도 괜찮다는 존중의 메시지다. 산불 현장에서 어르신을 업은 선원의 국적이 방글라데시든 인도네시아든 중요하지 않다. 그는 누군가의 아들이고, 동료이며, 이웃이었다. 그는 한 사람을 구했지만, 어쩌면 한국 사회의 무관심과 배제의 벽 너머에서 ‘우리’라는 정의를 되살린 인물이었는지도 모른다.
정부는 이 젊은 이웃들이 국내에 장기 체류할 수 있도록 특별기여자로 지정한다고 한다. 반가운 소식이다. 우리는 이렇게 선한 이웃과 함께 생활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었기에 더욱 의미가 있다. 이제는 보호와 시혜의 시선을 넘어, 국민과 시민이라는 이름으로 함께 살아갈 준비를 해야 한다. 한국 사회가 진정으로 성숙해졌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길, 그것은 ‘먼저 손 내민 이들’의 손을 붙잡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김구용국 경기도외국인복지센터장협의회 회장·문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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