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일제 잔혹한 ‘제노사이드’
광복에도 아픔 되새긴 지역주민들
“대학살 회상하자” 지역조직 주최
자발적 추모운동의 초기 사례 의미
수집가 박현철씨 입수자료 공개
“미군정 아닌 ‘우리쪽 기록’ 가치”
해방 여운이 남아 있던 1945년 가을 수원군 향남면 제암리는 26년 전 학살을 먼저 떠올렸다.
일제는 1919년 4월 15일 제암리에서 마을 주민 수십 명을 교회당에 가둔 채 불을 질러 살해했다. ‘제암리 학살’이라 불리는 이 사건은 당시 외신 보도를 통해 국제사회에 알려졌고 근대사 최초의 집단학살로 기록된다.
제암리 학살은 역사적 사건이자 국제적 이슈지만 그것에 앞서, 한 동네가 겪어내야 했던 비극이었다. 비극의 마을 향남면 주민들은 해방 이후 일제를 향해 날 것 그대로의 분노를 쏟아냈다. 조그마한 자비도 없이 만행을 규탄했고 원통하게 학살당한 이웃을 회상했다.
경인일보가 단독 입수한 자료를 보면 광복 이후에도 지역사회엔 제암리의 아픔이 현재진행형이었음을, 아물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향남인민위원회 문건에 담긴 시대상
이번에 공개되는 문건은 1945년 10월 20일 제암리 학살 희생자들을 추모하기 위해 열린 행사를 알리는 자료다. 광복이 갓 두달을 넘긴 시기에 작성된 문건에는 시대상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 여럿 등장한다.
문건 작성 주체는 해방 직후 몽양(夢陽) 여운형(1886~1947)이 주도한 조선인민공화국의 지방 단위 기구인 ‘향남면 인민위원회’다. 조선인민공화국은 외세 개입 없는 자주적인 좌우합작 민간 통치체계를 지향했다.
지역 주민들이 참극의 현장에서 직접 주최한 이 추모 기록은 해방 공간에서 우리 민족이 자발적으로 진실을 기억하려 한 초기의 사례로 평가된다.

문건에 담긴 건 민초의 격렬한 분노다.
‘발안 제암동 대학살 사건을 회상하자’는 제목의 문건에서 주최 측은 “이십칠년 전 삼월 일일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에 짓밟힌 우리 강산을 해방하려고 조선의 투사들은 유혈투쟁을 전개하였다. (중략) 우리는 제암동 예배당 대학살 사건이라면 누구나 잊지 못할 것이다. (중략) 극악한 일본 놈과 경관대 놈들이 동민 30여명을 교회당에 감금하고 방화하여 화염 속에 학살하고 말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어 “해방 조선의 우렁찬 종소리가 삼천리 방방곡곡에 들릴 때, 이 광명도 못 보고 원통하게 학살당한 동포를 회상하자”고 추모의 뜻을 밝혔다.

미군정이 아닌 한국민이 기록한 해방 직후
이 문건을 소장한 이는 역사자료 수집가 박현철(63)씨다. 박씨는 2010년대 초반 고서적 경매사이트를 통해 이 자료를 입수했다.
박씨는 “경매에 올라온 문건 속 ‘제암리’라는 지명이 눈에 들어왔고, 그 자체로 의미 있는 자료일 수 있겠다는 생각에 구입했다. 연구자들이 보면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해 보관해 왔다”고 말했다.
이어 “당시 향남면 인민위원회라는 지방 조직이 제암리 학살을 어떻게 기억하고 행사로 조직했는지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단순히 비극을 다룬 문건 그 이상으로 보였다”며 “지금까지 해방 공간을 보여주는 자료는 대부분 미군정 쪽 문서였다. 이건 우리(한국) 쪽에서 작성한 귀한 기록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덧붙였다.
행사 주최는 향남면 인민위원회, 후원은 수원청년동맹으로 기록돼 있으며 이 가운데 ‘수원청년동맹’은 지금까지 공문서나 공식 기록에서 확인된 바 없는 단체다. 향후 학계의 추가적인 조사와 연구가 필요한 대목이다.

“해방 직후 제암리 학살을 스스로 추모한 가장 이른 시기의 문서”
이 문건의 사료적 가치에 대해 박환 수원대 역사학과 명예교수는 “해방 후 혼란속에서도 일제의 만행을 규탄하는 동포들의 절규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며 “해방되자마자 제암리를 관할하는 향남면 주민들이 비로소 자유롭게 이 학살을 목놓아 규탄하고 추모한 자료로, 당시 자주 독립에 대한 열망이 얼마나 강했는지를 보여준다”고 평가했다.
이어 “조선인민공화국은 해방 직후 조선인들이 자주적으로 구성한 정부였고, 그 산하 조직인 향남면 인민위원회가 혼란 속에서도 학살을 기억하고 추모행사를 개최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해방 직후 주민들이 제암리 학살을 스스로 추모한 가장 이른 시기의 문서로 평가할 수 있다”고 밝혔다.
마지막으로 박 교수는 “미군정 이전 조선인민공화국 시기의 우리 측 자료 역시 발굴이 필요한 지점이다. 지금까지는 미국 측 자료에 의해 해방공간의 역사가 주로 정리됐기 때문”이라며 “이번 문건의 공개를 계기로 제암리 학살뿐 아니라 해방 공간에서 일제의 만행을 증언하는 국내 자료들을 더 폭넓게 발굴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조선인민공화국은?
1945년 8·15 해방 직후 여운형을 중심으로 좌우 합작 세력이 결성한 민간 임시정부 성격의 조직. 같은 해 9월 6일 ‘조선인민공화국’ 명의로 중앙조직과 함께 전국 각지에 인민위원회를 구성하고 주민 중심의 자치 행정 체계를 갖추려 했다.
그러나 같은 해 10월 초, 미군정은 이들을 사설 단체로 간주하고 승인하지 않았으며 조선인민공화국은 공식 정부로 인정받지 못한 채 점차 해산됐다. 초기에는 이승만을 최고 책임자인 주석으로 추대했지만 이승만이 이를 거부했고 여운형이 부주석을 맡았다. 향남면 인민위원회는 이 조직 체계의 한 지부였다.

국제사회 알려진 조선 최초의 집단학살 ‘제암리 사건’
제암리 학살은 1919년 4월 15일, 일본군이 수원군 향남면 제암리에서 3·1운동의 여파로 벌어진 격렬한 항일 시위 및 일본 순사 처단에 대한 보복으로 자행한 민간인 학살 사건이다.
일본 보병 제79연대 소속 아리타 도시오 중위가 이끄는 부대가 주민 30여 명을 교회당에 감금한 뒤 총을 쏘고 불을 질렀으며 일부는 도망치다 추격당해 살해됐다.

당시 교회당은 순식간에 화염에 휩싸였고 마을 전체 33채 가운데 31채가 전소됐다. 살아남은 이는 전동례씨 단 한 명뿐이었다.
학살의 표적이 된 제암리 마을은 천도교와 감리교 신자들이 중심이었던 공동체였다. 동학과 기독교의 정신이 뿌리내린 지역으로 일제는 이 마을을 사상적으로 ‘위험한 집단’으로 간주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 사건은 곧 외국인 선교사들에 의해 국외로도 알려졌다. 캐나다 선교사 프랭크 스코필드가 현장에 직접 들어가 촬영·기록한 사진과 보고서는 제암리 학살을 ‘국제적 제노사이드’로 규정짓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특히 1982년 제암리 학살의 실상을 알린 유일한 생존자 전동례씨의 증언은 역사 진상 규명의 실마리가 됐다. 재일조선인 2세 박수남 감독도 1990년 전동례씨를 직접 만나 인터뷰를 이어가며 참상의 전말을 영상으로 기록(2024년 11월14일자 15면 보도)하기도 했다.
전동례씨의 증언 이후 희생자 유해 발굴이 이뤄졌고 화성 지역사회는 매년 4월 15일 추모식을 통해 제암리 학살의 기억을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발안 제암동 대학살 사건을 회상하자’ 원문 번역 /자료 제공 박현철씨
이십칠년 전 삼월 일일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에 짓밟힌 우리 강산을 해방하려고 조선의 투사들은 유혈투쟁을 전개하였다.
독립만세를 부르짖는 수많은 군중에게 칼잽이와 개무리들은 용서없이 발포하고 창검으로 탄압하였었다.
시산혈하(屍山血河) 아, 조선 사람이라면 우리 동포라면 누구나 반항과 만세와 살육이 교착한 이 처참한 조선 역사의 한 페이지를 혈루와 통분이 없이는 회고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제암동 예배당 대학살 사건이라면 누구나 잊지 못할 것이다.
기미 삼월 십오일―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이날이다.
사사카(佐坂)라는 왜놈을 선두로 한 극악한 일본 놈과 경관대 놈들이 동민 30여 명을 교회당에 감금하고 이에 방화하여 화염 속에 학살하고 말았다.
포학한 그놈들은 이에 만족하지 아니하고 제암동 전 부락에 불을 질러 전소케 하고, 구사일생으로 이 곤경을 피하려는 부락민을 사살까지 하였었다.
악마와 같은 야만 일본 제국주의는 기어코 꼬꾸러졌다.
해방 조선의 우렁찬 종소리가 삼천리 방방곡곡에 들릴 때, 이 광명도 못 보고 원통하게 학살당한 동포를 회상하자!
수원의 동포여―모두 다 제암동 추도회에 참가하자!
제암동 학살 희생자 추도회
-일시: 시월 이십일 오전 십시
-장소: 수원 향남면 제암동 교회당
-주최: 향남면 인민위원회
-후원: 수원 청년동맹
참가 희망자는 시월 십구일까지 수원읍 인민위원회로 연락해주시면 편리를 도모하겠습니다.
희생자 추도금을 약간 내어 주시면 대단히 고맙겠습니다.
패잔 일본인을 철저히 배격하자!
사사카(佐坂) 등 공범자를 즉시 처형 요구!
조선 완전 독립 만세!
/유혜연기자 pi@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