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후 일제 만행 규탄, 동포 절규 상징적”
경인일보, 학살 106년 맞춰 공개
1945년 10월 향남면인민위서 작성
해방 직후 사회분위기·민심 담겨
지역민 주도행사 공식 기록 가치

해방 직후 수원군 향남면 주민들이 제암리 학살 사건을 직접 추모하며 일제 만행을 규탄한 문건이 처음으로 확인됐다.
경인일보는 광복 및 본사 창간 80주년이자 제암리 학살 발생 106년을 맞아 1945년 10월 수원군 향남면 인민위원회가 작성한 ‘제암리 학살 희생자 추모 행사’ 자료를 단독으로 입수해 최초 공개한다.
제암리 학살은 1919년 4월 15일, 일본군이 마을 주민 수십 명을 제암리 교회당에 가둔 뒤 총을 쏘고 불을 질러 집단 살해한 사건이다. 당시 현장을 조사한 캐나다 선교사 프랭크 스코필드의 보고서를 통해 국제사회에도 알려졌으며 3·1운동 등에 대한 보복 성격의 민간인 학살로 기록돼 있다.
공개된 문건은 해방 두 달 뒤인 1945년 10월 20일, 제암리 학살 희생자들을 추모하기 위해 열린 행사를 알리는 자료다. 지금까지 확인된 제암리 관련 실물 기록 가운데 이른 시기의 문건으로 지역 주민들이 주도한 추모 행사를 공식적으로 기록했다는 점에서 사료적 가치가 크다.
문건 작성 주체는 해방 직후 몽양(夢陽) 여운형(1886~1947)이 주도한 조선인민공화국의 지방 단위 기구인 ‘향남면 인민위원회’다. 조선인민공화국은 외세 개입 없는 자주적인 좌우합작 민간 통치체계를 지향했다.
이런 체계 아래 조직된 향남면 인민위원회는 학살이 벌어졌던 바로 그 지역에서 주민들과 함께 추모 행사를 계획했다. 특히 문건에는 당시 주민들의 분노와 열망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해방 직후 사회 분위기와 민심을 엿볼 수 있는 표현도 곳곳에 담겨 있다.
‘발안 제암동 대학살 사건을 회상하자’는 제목의 문건에서 주최 측은 “이십칠년 전 삼월 일일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에 짓밟힌 우리 강산을 해방하려고 조선의 투사들은 유혈투쟁을 전개하였다. (중략) 우리는 제암동 예배당 대학살 사건이라면 누구나 잊지 못할 것이다. (중략) 극악한 일본 놈과 경관대 놈들이 동민 30여명을 교회당에 감금하고 방화하여 화염 속에 학살하고 말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어 “해방 조선의 우렁찬 종소리가 삼천리 방방곡곡에 들릴 때, 이 광명도 못 보고 원통하게 학살당한 동포를 회상하자”고 추모의 뜻을 밝혔다.
문건을 소장한 이는 역사자료 수집가 박현철(63)씨다. 박씨는 2010년대 초반 고서적 경매사이트를 통해 이 자료를 입수했다. 박씨는 “경매에 올라온 문건 속 ‘제암리’라는 지명이 눈에 들어왔고 의미 있는 자료일 수 있겠다는 생각에 구입해 보관해 왔다”며 “연구자들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고 설명했다.
이 문건의 사료적 가치에 대해 박환 수원대 역사학과 명예교수는 “해방 후 혼란속에서도 일제의 만행을 규탄하는 동포들의 절규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문건”이라며 “해방되자마자 제암리를 관할하는 향남면 주민들이 비로소 자유롭게 이 학살을 목놓아 규탄하고 추모한 자료로, 당시 자주독립에 대한 열망이 얼마나 강했는지를 보여준다”고 평가했다.

/유혜연기자 pi@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