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현동에서 태어나 축현초 다닌 ‘동인천 키즈’
학생들 넘친 ‘동인천 전성시대’ 기억 생생해
광성고 중창단 ‘아가페’ 활동으로 성악가 꿈꿔
한예종 졸업 후 독일 유학에서 ‘바리톤’ 변신
콩쿠르서 잇단 성과 유럽, 카타르 무대 활약
국립오페라단 ‘박쥐’ 아이젠슈타인 국내 데뷔
뮤지컬 ‘쌍화별곡’서 여주인공과 사랑에 빠져
시민 참여 ‘뮤지컬 위드 미’로 고향에 이바지

19세기 유럽 귀족들의 화려한 가면 무도회를 배경으로 하는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오페레타 ‘박쥐’.
바리톤 안갑성은 지난달 25일 롯데콘서트홀에서 열린 한경아르떼필하모닉 정기 연주회 ‘2025 새봄을 여는 왈츠의 향연 : 요한 슈트라우스 2세 탄생 200주년 기념 음악회’에서 ‘박쥐’의 주인공 아이젠슈타인 남작으로 무대에 올랐다. 그는 이번이 몇 번째 아이젠슈타인인지 셀 수 없을 정도로 그 역할로만 수많은 공연을 소화했다.
클래식과 뮤지컬의 경계를 넘나드는 전천후 성악가 안갑성. 그는 무도회장의 귀족처럼 화려한 역할을 벗고 무대에서 내려온 뒤에는 막 첫발을 뗀 사업가로, 한 가정의 남편이자 아빠로, 그렇게 생활인으로 돌아온다. 무대 뒤편의 안갑성은 그렇게 누구보다 열심히 뛰고 있다. 그가 정상급 성악가로 우뚝 서기까지는 항상 무대 뒤편에서 더 분주했다.
지난 2일 오전 인천 SSG랜더스필드 지하에 있는 인천시 공공 소극장 ‘문학시어터’에서 안갑성을 만났다. 록커 같은 복장으로 나타난 성악가는 대화할 때도 에너지가 넘쳤다. 쩌렁쩌렁한 성량의 목소리가 소극장 안에서 울리며 한참을 맴돌았다. 그의 노래를 가까이에서 들으니 ‘목소리가 악기’라는 말이 실감됐다.
1981년생 바리톤 안갑성은 인천 중구 인현동에서 나고 자랐다. 해운업에 종사한 아버지와 은행원 출신 어머니의 막내 아들이다. 함께 성악을 전공한 세 살 터울 형이 있다. 아버지는 인천 토박이다. 할머니는 동인천역 앞에서 ‘평화제과’라는 제과점을 운영했다.
안갑성은 1987년 인현동에 있던 인천축현초등학교에 입학했다. 개교 역사를 따지면 1919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축현초는 현 인천시교육청 학생교육문화회관 자리에 있다가 2001년 연수구 옥련동으로 이전했다.
그는 ‘동인천 키즈’다. 안갑성이 축현초에 다닐 때는 ‘동인천 전성시대’가 아직 저물지 않았을 때다. 안갑성의 기억도 마찬가지다.
“저희 집이 지금 학생교육문화회관(축현초) 바로 뒷길에 있었어요. 제물포고, 인일여고, 인천여고, 인성여고, 대건고, 광성고는 물론 중학교도 엄청 많아서 그 학생들이 전부 동인천에 모였거든요. 중학교·고등학교에 다니는 형, 누나들한테 최신 유행은 다 접했어요. 음반 파는 레코드 가게에선 최신곡이 끊임없이 나오고 인천백화점(현 동인천역사), 떡볶이집, 탁구장, 팬시아트점…. 없는 게 없는 동네였죠. 워낙 번화가라 서구, 남구(현 미추홀구)로 넘어가려면 동인천에서 버스를 타야 했어요.”

동인천을 안다면 모두가 기억하는 풍경이다. 인천의 옛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는 유동현 전 인천시립박물관장은 인천시가 2015년 발간한 ‘동인천 잊다 있다’에서 “이렇게 많은 학교가 반경 300m 이내에 있는 예는 우리나라에서 그리 흔하지 않았다. 1970년대, 80년대 등하교 시간에 이곳은 마치 거대한 펭귄 떼가 이동하는 모습을 연상시킬 만큼 온통 교복 입은 학생들뿐이었다. (중략) 다른 도시에서 보기 드문 대형 문구점과 체육사를 비롯해 화방, 학원, 탁구장, 사진관, 분식집 등이 한데 모여 성업을 이뤘다”고 했다.
부모님은 클래식 음악을 좋아했다. 노래의 매력에 먼저 빠진 건 현재 서울아산병원 발성치료사로 널리 알려진 형 안대성씨다. 형이 거실에서 피아노를 치며 연습하는 노래를 들으면서 그 가사를 되뇌였다. 인하대학교 사범대학 부속고등학교로 진학한 형은 학교 중창단 활동을 하면서 본격적으로 성악의 길을 걷게 된다. 안갑성도 교회 성가대에 늘 참여하며 노래를 부르다 1996년 광성고등학교로 진학해 학교 중창단 ‘아가페’ 활동을 시작했다.
“광성고 중창단 ‘아가페’가 굉장히 유명했습니다. 저를 포함해 성악가를 꽤 배출했어요. 저는 아가페 18기 보조와 19기 출신입니다. 원래 2학년부터 활동할 수 있는데, 저는 특별히 1학년부터 선배 기수인 18기 보조로 들어가면서 2년을 활동한 셈이죠. 단국대 성악과에 있는 선배나 경희대 성악과로 진학한 선배가 주말이면 학교로 찾아와 노래를 가르쳤어요. 저처럼 지금 40대 중반에서 50대 초반인 분들은 학창 시절 인천에서 고교 중창단이 얼마나 인기였는지 잘 알 겁니다.”
당시엔 학교마다 중창단 동아리가 활발했다. 숭의교회나 주안장로교회 같은 대형 교회에서 학생 중창 대회를 개최했다. 안갑성도 광성고 아가페 단원으로 대회에 출전했다. 각 팀의 무대가 끝나면 교회 앞마당에선 학교 참가자들이 다같이 모여 손을 잡고 원을 그리며 노래를 부르던 풍경이 안갑성에겐 참 따뜻했던 학창 시절의 기억으로 남았다. “우리들만의 세시봉” 같았다고 한다.
안갑성은 고3 때부터 성악 레슨을 받으며 음대 진학을 준비했다. 동인천 대한서림에서 구한 이탈리아어 사전을 펴 보며, 서울 압구정동 신나라레코드에서 산 클래식 음반 표지나 명동 대한음악사에서 산 악보를 드문드문 읽었다. 안갑성은 성악을 택한 이유에 대해 “솔직히 공부를 너무 못했다”고 겸손하게 얘기했지만, 이미 그의 재능은 충만했다.
인천에서 음대를 다니고 싶었는데, 인천에는 그때나 지금이나 음대가 없다. 1년의 레슨 경험으로 안갑성은 ‘한국의 줄리어드 스쿨(The Juilliard School)’을 지향하며 1993년 개교한 국립 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원 성악과에 99학번으로 합격했다. 한예종에 입학할 때 안갑성의 음역대는 베이스였다.
“아주 치열한 레슨과 연습으로 예술가를 길러 내는 학교입니다. 쟁쟁한 예술고등학교 출신 동기들이 모였죠. 제가 입학할 때만 해도 인천예술고등학교(1998년 개교)는 졸업생을 배출하기 전이었습니다. 저만 빼고 성악과 동기 20여 명이 거의 예술고 출신이었다고 보면 됩니다. 저는 한예종에 입학해 오페라 클래스에서 오페라를 거의 처음 접했는데, 동기들은 이미 예술고에서 독일어, 이탈리아어 아리아까지 다 떼고 온 거지 뭡니까. 저는 독일어 가사 읽기에 급급했는데, 다른 학우들은 벌써 뛰거나 날고 있었던 것이지요. 인천예고 출신 후배들은 제가 군복무를 마치고 복학했을 때야 들어와 있었습니다.”
수업 시간마다 주눅이 들었다. 자신감을 잃은 안갑성은 스스로 “정신무장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택한 게 해병대 입대다. 1학년 1학기를 마친 안갑성은 그해 8월 해병대에 입대해 경북 포항 교육훈련단에서 신병 교육 후 자대 배치를 받았는데, 그곳은 해병대 6여단이 있는 백령도였다.

1999년 6월15일 ‘1차 연평해전’이 발발한 직후였다. 한국전쟁 이후 서해상에서 벌어진 남북 간 첫 교전이었다. 경인일보 특별취재팀이 2012년 낸 ‘세계사를 바꾼 인천의 전쟁’에서 정리한 1차 연평해전의 상황은 이렇다.
‘북한 경비정들이 꽃게잡이 어선 단속을 빌미로 연평도 쪽 NLL(북방한계선) 해상을 넘어오자 우리 해군 함정들이 선체로 들이받는 이른바 밀어내기 작전을 폈다. 당시 북한 경비정은 25㎜ 기관포 등으로 선제 공격을 가해왔고, 이에 해군이 초계함의 76㎜ 함포와 고속정의 40㎜ 기관포로 응사해 북한 어뢰정 등을 침몰시켰다.’
군의 병력 증강 계획으로 안갑성을 비롯한 많은 해병대 동기가 백령도 6여단을 비롯한 서해 5도에 배치됐다고 한다. 인천항 연안부두에서 지금은 사라진 백령도·대청도행 여객선 데모크라시호(396t)를 타고 부대를 오갔다. 그때 백령도 군 장병들 사이에서 다방이 유행이었는데, 어느 시점엔가 섬에 속속 생겨난 PC방들이 다방을 대체했다고 한다.
“인천 살면서도 백령도가 그렇게 큰 섬인지 몰랐습니다. 제가 속한 대대는 훈련 중심이라 고무보트(IBS) 훈련 등을 엄청나게 했습니다. 작전장교님이 성악 전공하는 저를 좋게 봐서 백령도 교회 성가대에서 노래하게 해줬어요. 고참이 되고 나선 이탈리아 가곡집을 틈틈이 읽으면서 음악을 놓지 않으려 노력했습니다. 군 생활 때 가장 좋았던 건 휴가 때 연안부두에 내려서 28번 버스를 타고 저희 집(동구 화수동)에 금방 갈 수 있었던 겁니다. 다른 지역에 사는 동료 장병들은 연안부두에서도 집이 천리길인데 말이죠.”
2년2개월간 군 복무를 무사히 마치고 복학했으나, 외환위기(IMF 사태) 여파로 집안 사정이 어려지면서 학업에만 매진할 수 없었다. 방학 때면 교회 장로가 운영하는 남동국가산업단지의 중견 제조기업 ‘한성정공’에서 형과 함께 일했다. 1985년 설립된 한성정공은 산업기계·공작기계용 윤활급유 펌프와 냉각용 절삭유 펌프 등을 주로 생산한다. 한성정공 김창선 대표가 안갑성과 형에게 도움을 준 주안감리교회 장로다.
“저는 오일 펌프를 만드는 공정에서 일했고, 형은 기판을 짰습니다. IMF 여파로 아버지 사업이 어려워졌고, 건강도 좋지 않았어요. 공장에선 내내 라디오 방송을 틀었는데, 그때 라디오를 실컷 들은 것 같습니다. 나중에 이야기하겠지만, 제가 유학 후 만든 클래식 인디밴드 이름이 ‘이지라디오’입니다. 한성정공 다닐 때 라디오를 들은 기억이 참 좋았는데, 그렇게 편하게 듣는 음악을 지향한 팀입니다.”
어렵게 성악가의 꿈을 키워 가던 안갑성은 한예종을 졸업할 무렵 유학을 결심하게 된다. 그와 함께 성악을 전공한 형의 양보가 고마웠다. 형 안대성씨는 한양대학교 성악과를 나와 다른 학교에서 음성학을 더 공부했다. 이를 토대로 독보적 영역인 발성치료사로 나아가 명성을 얻었고, 2023년 TV 인기 예능 프로그램 ‘유 퀴즈 온 더 블록’에 출연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한예종 음악원 캠퍼스가 있는 서울 예술의전당은 클래식 공연이 있을 때마다 외부 전광판으로 공연 실황을 동시 중계했다. 수업을 마친 안갑성은 예술의전당 전광판 앞에 서서 세계 유수의 클래식 음악가들의 공연을 바라봤다. ‘저 음악가는 저렇게 제스처를 하는구나. 연주가 끝나면 지휘자와 저런 식으로 인사를 나눠야 하는구나’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외국 사람들에게 내 노래가 어떻게 들릴까’라는 물음과 함께 세계 무대에 서는 꿈을 꿨다.

2007년 독일 베를린행을 택했다. 옛 동베를린 지역에 있는 한스 아이슬러 국립음대에 입학했다. 독일에서 자기 소리를 찾았다. 베이스였던 안갑성은 독일 베를린 국립음대 교수의 권유로 현재 음역대인 바리톤, 정확하게는 독일에만 있는 테너와 바리톤의 중간 격인 ‘리릭 바리톤’(서정적 바리톤)으로 새출발했다.
“지금은 은퇴한 메조 소프라노 안젤리네 프리트 선생님인데, 유학 시절 학교에서 ‘목소리는 마음의 투영’이라는 걸 저에게 가르치셨습니다. 베이스에서 바리톤으로 옮기는 건 권투의 체급을 올리는 거랑 비슷하게 힘든 과정이에요. 베를린은 날씨가 요상해서 아침 8시에 해가 뜨면 오후 3시에 해가 집니다. 슈만의 ‘시인의 사랑’이란 가곡은 ‘드디어 아름다운 5월이 왔어’란 가사로 시작됩니다. 독일에 가보니 알겠더군요. 5월이 되면 해가 새벽 6시에 뜨고 늦게 집니다. ‘5월이 이렇게 아름다운 계절이라서 슈만이 노래를 지었구나’ 하고, 저도 느꼈습니다.”
유학 시절 콩쿠르 출전은 단순히 입상만 위한 게 아니었다. 콩쿠르 입상 상금으로 생활비를 충당해야 했다. 고학생(苦學生)의 콩쿠르 출전기도 생생하다.
“초반에는 굉장히 많은 실수를 했습니다. 출전 곡이 저에게 어울리는지 아닌지 제대로 구분하지 못했어요. 콩쿠르에 출전하려면 두 달 치 집세를 걸어야 합니다. 스위스나 스페인까지 항공료에 식비, 숙박비는 물론 가기 전에 레슨도 받아야죠. 그렇게 준비했어도 처음에는 콩쿠르에서 우수수 떨어졌습니다. 그러다 독일에서 임링(Immling)이라는 오페라 페스티벌에서 1위로 입상했고, 이후 승승장구합니다.”
독일, 오스트리아 빈 등지에서 열린 콩쿠르에서 입상하면서 오페라 공연 배역을 맡기 시작했다. 2010년 독일에서 콩쿠르 1위를 차지한 젊은 독일 오페라 가수를 선정해 일종의 ‘왕중왕전’ 콘서트 실황과 준비 과정을 담은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에도 출전했는데, 그 프로그램에서도 남성 부문 1위(엠머리히 즈몰라상)를 거머쥐었다. 오스트리아 클라겐푸르트, 카타르, 독일 뷔르츠부르크와 베를린 등지에서 각종 공연 무대에 올랐다. 고전부터 현대 작품까지, 20여 개의 다양한 오페라와 오페레타 무대를 소화했다.
국내로 돌아오게 된 계기가 만들어진 건 안갑성이 한스 아이슬러 국립음대 성악과 최고 연주자 과정을 ‘최고 점수’로 졸업하고, 현지에서 왕성하게 활동하던 2012년이다. 안갑성은 한국 국립오페라단 관계자들이 국내 공연 캐스팅을 위해 베를린에 와 있다는 소식을 접했다.
“훗날 국립오페라단 예술감독을 지내시는 윤호근 지휘자가 당시 베를린 국립극장 슈타츠오퍼에 있을 때 같이 활동하며 저를 많이 챙겨주셨습니다. 어느 날 국립오페라단이 베를린에 들어왔다는 걸 알려줬어요. 무작정 찾아가면 만나주지 않을 테니 우선 국립오페라단 관계자들을 쫓아다니라고 하셨죠. 정말 그분들이 다니는 공연장이고 카페고 멀찌감치 떨어져서 쫓아다녔어요. 그 노력을 가상하게 여겼는지, 관계자 한 분이 ‘내일 아침 빈으로 출국하니 그 전까지 활동 자료를 DVD에 담아 호텔로 가져오라’고 했죠. 이후 국립오페라단에서 저를 오페레타 ‘박쥐’의 주인공으로 초대했습니다.”
안갑성은 2012년 12월 예술의전당 오페라하우스에서 열린 ‘국립오페라단 창단 50주년 오페라 갈라 콘서트’에서 오페레타 ‘박쥐’의 아이젠슈타인 역할을 맡아 국내 데뷔 무대를 치렀다. 본격적인 국내 활동의 서막이었다. 이듬해 2월에는 국내에선 생소했던 클래식 인디밴드 ‘이지라디오’를 결성해 대중적으로 고전과 현대 음악의 접점을 찾는 시도를 했다.

2013년 6월 ‘제7회 대구국제뮤지컬페스티벌’(딤프·DIMF)에서 공연된 뮤지컬 ‘소프 오페라’에 참여한 것을 계기로 뮤지컬로도 활동 영역을 넓혔다. 안갑성의 장기인 오페레타는 미국에서 뮤지컬이란 장르로 재탄생된다. 그의 음악 인생 변곡점이기도 하다.
뮤지컬 차기작은 중국으로 무대를 옮긴다. 안갑성은 원효대사와 요석공주의 이야기를 다룬 뮤지컬 ‘쌍화별곡’(이란영 연출, 장소영 음악감독)의 남자 주인공 원효로 캐스팅됐는데, 이 공연으로 2013년 12월부터 이듬해 1월까지 베이징과 광저우를 비롯한 중국 4개 도시 투어를 진행했다. 여자 주인공 요석공주는 안갑성의 아내인 뮤지컬 배우 김민주였다.
“공연 연습할 때는 김민주 배우와 별로 안 친했어요. 그런데 중국 땅이 워낙 넓으니까 투어 공연이 너무 힘든 거예요. 3시간 비행기를 타고 내려 3시간 자동차를 타고 호텔에 도착해 연습하고 공연하고, 또 3시간 비행해서 다른 도시로 이동하고…. 남녀 주인공은 어디 나가지도 못해 호텔에서 같이 밥을 먹고 차를 마시다가 친해졌습니다. 이후 감정 연기에서 몰입도 잘 됐고요. 성황리에 공연을 끝내고 귀국해서 김민주 배우와 연애를 시작했습니다.”
성악가와 뮤지컬 배우 커플은 2015년 결혼에 골인한다. 2020년 복덩이 아들도 태어났다. 부부가 함께 활동하는 일이 많아졌다. 안갑성은 2022년 ‘오픈헤르츠 아트컴퍼니’란 회사를 설립해 김민주 배우와 함께 뮤지컬 갈라 콘서트 중심으로 클래식, 재즈 등 각종 공연을 꾸려 가고 있다. 김민주 배우는 “클래식 음악을 하는 남자와 뮤지컬을 하는 여자가 만나서 같은 듯 다른 듯한 시너지로 좋은 레퍼토리를 만들고 있다”며 “남편의 성악계 인맥과 저의 뮤지컬계 인맥이 만나 많은 성과를 내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해부터 안갑성은 고향 인천에서 김민주 배우와 함께 특별한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있다. 문학시어터가 지난해 처음 추진한 시민 참여 뮤지컬 교육·공연 프로젝트 ‘뮤지컬 위드 미’(MUSICAL with ME)의 책임 강사로서 평범한 시민을 뮤지컬 배우로 만들어 내고 있다. 지난해 6월 말 ‘뮤지컬 위드 미’ 1기 참가자들이 2개월 동안 프로그램에 참여해 최종 공연을 선보였고, 내달 중순부터 2기 참가자들을 만난다.

“우선 문학시어터라는 좋은 공공 공연장이 있어 가능한 프로그램입니다. 무대와 음향시설은 물론 객석과 대기실 등이 최고 수준으로 갖춰져 있어요. 학생부터 평범한 주부나 한때 배우의 꿈을 꿨던 분, 은퇴하신 분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평범한 시민들이 각자의 사연과 열정을 갖고 뮤지컬 배우가 되기 위해 열심히 땀을 흘립니다. 오히려 제가 그분들의 열정을 배웁니다. 내 고향에서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자체가 저에겐 큰 기쁨입니다.”
안갑성의 고향에 대한 애정은 아내가 더 잘 안다. 김민주 배우는 “연애할 때부터 동인천이나 신포시장에서 데이트하면서 ‘이게 공갈빵이야’ ‘여기가 유명한 경양식집이야’라고 하면서 엄청 자랑하곤 했다”며 “남편은 본인이 ‘독일 사람 같다’고 하지만, 제가 볼 땐 뼛속까지 인천 사람”이라고 말했다.
안갑성은 지금도 속상한 일이 있거나 마음이 복잡할 땐 동인천을 찾는다. 그곳엔 추억을 되새길 흔적들이 여전히 살아 숨쉬고 있다. 이런 풍경이 곧 사라질지 모른다는 생각에 안타깝기는 하다. 안갑성은 인천을 조금 더 곁에 두고 싶다. 자신의 활발한 성격을 디딤돌 삼아 인천 출신 성악가 선후배들을 연결하는 활동도 하고 싶다고 한다. 인천에 음악대학이 없는 것도 여전히 아쉽다. 국내 최고 수준의 예술대학, 유럽의 선진적 무대를 모두 경험하고도, 안갑성은 돌고 돌아 결국 인천이라고 했다.
■ 약력
1981년 인천 출생
1993년 인천축현초등학교 졸업
1996년 송도중학교 졸업
1999년 광성고등학교 졸업
2006년 한국예술종합학교 성악과 예술사 졸업 (양희준 교수 사사)
2010년 베를린 한스 아이슬러 국립음대 성악과 디플롬 졸업 (안젤리네 프리트 교수 사사)
2012년 베를린 한스 아이슬러 국립음대 성악과 최고연주자과정 졸업
2013년~ 클래식 인디밴드 ‘이지라디오’ 제작자
2015~2017년 청음 뮤직페스티벌 심사위원
2016~2022년 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원 성악과 전공실기 강사
2025년 태안군 홍보대사
2022년~ 오픈헤르츠 아트컴퍼니 대표
■수상 내역
2007년 독일 학술교류처 선정 최고 외국인 장학생상
2008년 바이로이트 바그너협회 장학생
2009년 독일 임링 국제라이온스 성악 콩쿠르 1위
2009년 안넬리제 로텐베아거 성악 콩쿠르 1위
2009년 빈 클래식 마니아 국제 콩쿠르 2위
2010년 독일 엠머리히 즈몰라상(독일 TV 데뷔 콩쿠르 남자 1위)
2012년 라인스베악 국제 콩쿠르 입상
2013년 인천문화재단 2013~14 신진예술가 선정
■ 주요 공연·작품
뮌헨심포니오케스트라, 카타르심포니오케스트라, 바쿠국립오케스트라, 하일부론심포니오케스트라, 경기필하모닉오케스트라 등 협연.
오페레타 ‘박쥐’(아이젠슈타인), ‘유쾌한 미망인’(다닐로), 오페라 ‘사랑의 묘약’(벨꼬레), ‘여자는 다 그래’(굴리엘모), ‘마술피리’(파파게노), ‘잔니 스키키’(잔니 스키키), ‘신데렐라’(단디니), 뮤지컬 ‘쏘프 오페라’(티처), ‘쌍화별곡’(원효), ‘금강 1894’(홍계훈).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