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 옛날 민주화를 향한 뜨거웠던 마음이 아직까지 생생하게 남아 있습니다.”
65년 전 4·19혁명 당일 인천공고(현 인천기계공고) 교문 밖으로 뛰쳐나와 거리에서 “이승만 정권 퇴진”을 외쳤던 학생들이 백발의 노인이 되어 교정을 다시 찾았다.
1960년 4월 이승만 대통령과 자유당 정권의 3·15 부정선거로 촉발된 반독재 민주화운동이 전국 각지에 번졌다. 4월11일 경남 마산 앞바다에서 김주열 열사의 시신이 발견됐고, 일주일 뒤인 18일 시위에 참여했던 고려대 학생들이 피습을 당하는 사건이 이어졌다. 이 사건들은 인천공고 학생들을 움직였다.
당시 인천공고 3학년 1반 반장이었던 김승웅(82)씨는 “전날(18일) 고려대 학생들이 피해를 입었다는 소식을 듣고 19일 교실 앞 단상에 올라가 ‘우리가 가만히 있으면 안된다, 인천에서는 우리가 나서야 한다’고 외쳤고, 친구들과 밖으로 뛰쳐나갔다”고 당시 기억을 떠올렸다.
정권 반대 시위에 나선 인천공고 재학생들은 경찰서로 연행돼 심문을 받는 등 고초를 겪었다.
김씨는 “20일 경찰서에 끌려가 밤새도록 두들겨 맞고, 이틀이 지난 22일 새벽 4시가 돼서야 경찰서를 나올 수 있었다”며 “경찰서에서 있었던 일은 발설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쓰고 지장까지 찍었다”고 했다.
(사)인천기계공고 4·19혁명 기념사업회는 18일 오전 11시께 인천기계공고 교정에서 65주년 기념식을 열었다. 이날 행사에는 김씨 등 졸업생들과 재학생 250여명이 참석했다. 이들은 4·19 노래를 함께 부른 뒤 교정에 있는 ‘4·19 학생의거기념탑’에 헌화했다.
기념식에서 만난 인천기계공고 부회장 강성욱(18)군은 “선배님들이 민주화운동을 해주셔서 우리가 이렇게 발 뻗고 편히 살아갈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며 “인천기계공고 학생으로서 자긍심을 느끼고 있다”고 했다.
최승일 인천기계공고 4·19혁명 기념사업회장은 “인천기계공고의 정신적 유산인 4·19혁명의 숭고한 가치를 후배들이 계승해 나갔으면 한다”고 했다.
/백효은기자 100@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