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 출마 선언한 후보들에게 바람
정권 바뀔 때마다 R&D 예산 ‘흔들’
기초과학·학문 전공 대학원생에게
학비 걱정 없도록 국가의 지원 제안
자유롭게 연구 가능한 세상 만들길

헌법재판소의 탄핵 인용 후 대한민국의 정치 시계는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탄핵 선고 60일 이내 치러야 하는 대선을 앞두고 각 대권 주자들은 분주히 뛰고 있다. 탄핵을 예상하고 공약을 미리 준비한 후보도 있지만 갑작스레 출마를 선언한 후보들은 정책을 가다듬을 시간이 부족한 현실이다. 그러나 나라를 이끌겠다고 나선 사람이라면 적어도 어떤 나라를 만들고 싶은지, 어떤 미래를 그리는지 분명하게 밝혀야 할 것이다. 필자는 오랫동안 대학 강단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젊은 연구자들과 함께 실험실을 지켜온 과학자다. 평범한 시민으로서, 정치인들에게 작은 소망 하나를 전하고 싶다. 부디 한 과학자의 바람을 가볍게 흘려듣지 않기를 바란다.
첫번째 바람은 제발 과학자들이 절망하지 않고 자유롭게 연구할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 주었으면 좋겠다. 대다수 과학자는 묵묵히 연구하고 가르치며 살아간다. 그들에게 가장 큰 기쁨은 자신의 연구가 언젠가 세상의 빛이 되는 순간을 상상하는 것이다. 하지만 기초과학은 특성상 오랜 시간 인내해야 한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기초과학 R&D 예산을 흔들었다. 당장 성과가 보이지 않으니 실용적인 공학이나 산업 분야에 투자해야 한다고 한다. 옳을 수 있지만 매우 단견이다. 기초과학은 꾸준히 연구해야 그 축적 효과가 나타난다. 최근엔 그나마 유지되던 연구비가 대폭 삭감돼 많은 연구자가 연구를 접거나 외국으로 떠나는 것을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다. 연구비 예산을 일부 복원했지만 ‘생색내기’에 불과하다. 외국인에게 퍼주기식 연구과제와 대형 연구과제에 집중된 연구비 지원은 풀뿌리 연구자들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다. 연구비가 줄어든 여파는 당장 눈에 보이지 않을지 몰라도 5년, 10년 뒤 과학기술 생태계 전체를 뒤흔들 것이다. 한번 삭감된 연구비를 복원하기 위해선 과거 수준을 회복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연구비를 받지 못한 연구자들이 적체되고 있다. 이를 해소하기 위해선 연구비를 삭감 이전보다 최소 30% 이상 늘려야 한다. 일본이 메이지 유신 후 150년 동안 기초과학에 꾸준히 투자해 오늘의 과학 강국이 된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나라는 아직 그 출발선에도 제대로 서지 못했다.
두번째 바람은 대학원생, 특히 기초과학·학문을 전공하는 젊은 연구자들에게 국가가 아낌없이 지원해주기를 바란다. 미국, 유럽, 일본 등 과학 선진국에서는 대학원생을 단순한 학생이 아니라 미래를 이끌 연구인력으로 존중하고 지원한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대학원생이 학비 걱정, 생계 걱정에 시달리며 연구를 이어간다. 기초과학을 전공하는 대학원 석·박사 학생들에게 전액 국가장학금을 지원하여 학비 걱정 없이 연구할 수 있는 제도를 제안해 본다. 학부제 이후 기초과학은 설 자리를 잃었다. 지방은 물론, 수도권에서도 물리학과가 사라지고 있다. 물리학과의 취업률은 괜찮은 편이지만 사람들은 기초과학을 ‘돈 안 되는 공부’로 치부한다. 이대로라면 우리나라는 기초과학의 씨앗조차 남지 않을 것이다. 요즘 많은 학생이 인공지능, 반도체 같은 ‘대세’ 분야로 몰린다. 하지만 이런 기술도 결국은 기초과학이라는 든든한 뿌리 위에서만 꽃을 피울 수 있다. 10년, 20년 뒤 새로운 기술이 등장해도 기초학문을 탄탄히 다진 인재만이 그 변화에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단기 성과에 집착하는 정책으로는 결코 과학기술 강국이 될 수 없다. 긴 호흡으로, 묵묵히 뿌리를 키워야 한다.
기초과학은 하루아침에 열매를 맺지 않는다. 지루해 보이지만 한 길을 끈질기게 탐구하는 것이 과학자의 삶이다. 연구비 삭감, 사회적 냉대 속에서도 묵묵히 연구실에 불을 켜고 있는 이들에게 대한민국의 미래가 달려있다. 이제는 달라져야 한다. 새로운 정부는 기초과학을 국가 미래의 토대로 삼길 기대한다. 과학자들이 눈물 흘리지 않고 기초학문이 홀대받지 않는 나라. 그런 나라에서 성장한 연구자들은 누구보다 창의적이고 독창적인 연구를 해낼 것이다. 누군가의 작은 연구가 먼 훗날 우리의 삶을 바꿀 것이다. 나는 오늘도 그 믿음을 품고 연구실의 불을 밝힌다. 부디, 이 조용한 불빛이 꺼지지 않게 해주기를 기원한다!
/이재우 인하대 교수·前 미래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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