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을 통해 본 식민지 사법 제도

■ 광복·창간 80주년 특별기획 취재팀은 일제강점기 각종 사건·재판 기록을 국가기록원, 국사편찬위원회 등에서 확보해 일일이 검토·분석했다. 기록을 찾지 못해 부족한 부분은 기존 연구 자료와 전문가 취재 등으로 보완했다. 독자들이 보다 생생하고 흥미롭게 일제강점기 법정 이야기를 접할 수 있도록 스토리텔링 방식을 택했으며, 그 이야기의 사실성과 객관성을 확보하고자 ‘각주’를 첨부해 참조한 자료들을 밝힌다. 흔적이 많이 남지 않아 흐릿해진 역사 이야기를 수작업과 생성형 AI(인공지능)를 활용해 그림으로도 그린다.

“온 조선인에게 조선의 독립 사상을 고취해 각지에서 독립시위운동을 개시하기로 했다. (피의자들은) 그 운동이 당연한 결과로서 내란죄의 소요인 폭동 행위를 하게 될 것으로 알고 있었다”

조선총독부가 1921년 발간한 ‘사진첩 조선’에 수록된 경성지방법원의 재판 모습. /서울역사박물관 서울역사아카이브 사진 재가공, 일러스트/박성현기자 pssh0911@kyeongin.com
조선총독부가 1921년 발간한 ‘사진첩 조선’에 수록된 경성지방법원의 재판 모습. /서울역사박물관 서울역사아카이브 사진 재가공, 일러스트/박성현기자 pssh0911@kyeongin.com

“조선의 독립을 목적으로 하는 폭동을 일으키게 했다. 이것은 내란죄에 해당하는 범죄다.”1

3·1운동의 열기가 식을 줄 모르던 1919년 8월6일. 경성에 있는 조선총독부 고등법원 검사국 소바야시 린고로(草場林五郞) 검사는 그해 3월1일 오후 2시 서울 종로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서를 발표한 민족대표 33인 등 3·1운동의 초기 주도자 48명에 대해 형법 제77조 ‘내란죄’로 기소하면서 예심 판사를 임명해 달라고 고등법원에 청구했다.

3·1운동 초기 주도 48명 예심 청구

일제 검찰 소바야시, 내란으로 고법에

궁색한 근거… 일제 법원도 불인정

우리 민족이 일제의 한일 강제병합을 거부하고 식민지 지배 정책에 대해 전면적으로 저항해 ‘독립 만세’를 외친 한국독립운동사의 가장 중요한 사건2에 일제의 검사는 내란죄를 씌워 재판에 넘겼다.

소바야시 검사는 내란죄 기소 이유에 대해 예심 청구서에 이렇게 끄적거렸다.

“조선을 일본제국의 통치로부터 이탈시켜 그 지역에 새로운 하나의 독립국을 건설하려는 목적으로 조헌(朝憲)을 문란하게 하는 불온한 문서를 공표하고, 온 조선인에게 조선의 독립 사상을 고취해 각지에서 독립시위운동을 개시하기로 했다. 그래서 (피의자들은) 그 운동이 당연한 결과로서 내란죄의 소요인 폭동 행위를 하게 될 것으로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나 1920년 3월22일 고등법원은 3·1운동 지도자 48명이 내란죄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고등법원은 ‘보안법’ ‘출판법’ ‘정치에 관한 범죄 처벌의 건’ ‘조선형사령’ 등 옛 대한제국 또는 조선총독부 법령과 일본의 ‘형법’을 적용해야 한다며 지방법원에서 다시 재판하라고 사건을 넘겼다. 만세운동이 독립을 격려·고무하는 데 그쳤고, 폭동을 수단으로 독립을 달성할 목적이 없었다는 게 고등법원 주요 판단 이유였다.3 제국주의 시대였던 당시 전 세계에서 열강의 탄압을 받던 여러 나라의 민족운동에 큰 영향을 끼친 ‘평화 시위’인 3·1운동을 ‘내란’으로 탈바꿈하자니, 일제의 사법 당국도 그 근거가 매우 궁색했다.

그러나 이들이 내란죄를 벗었다고 사법 탄압이 끝난 건 아니었다. 일제의 사법 제도는 독립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독립운동가들을 굴복시키기 위해 촘촘한 그물망처럼 짜였다. 조선총독부는 총독의 명령으로 제정한 ‘제령’ 등 각종 법령을 일본 열도의 사법 제도와는 별도로 마련하고 적용해 독립운동가들을 옭아맸다.

내란죄 벗었지만 촘촘한 사법탄압

총독 ‘제령’… 열도와 다른 제도 적용

3·1운동 관련자들 속속 처벌 받아

예심서 무기한 구속·판사가 고문도

조선치형협회가 1924년 발간한 ‘조선형무소 사진첩’에 수록된 서대문형무소 감방 모습. 출처/국립중앙도서관
조선치형협회가 1924년 발간한 ‘조선형무소 사진첩’에 수록된 서대문형무소 감방 모습. 출처/국립중앙도서관

특히 조선총독부는 3·1운동 관련자들을 신속하게 처벌하기 위해 1919년 4월15일 ‘정치에 관한 범죄 처벌의 건’(제령 제7호)을 제정했다. 제령 제7호는 ‘정치의 변혁을 목적으로 하여 다수 공동으로 안녕질서를 방해하거나 또는 방해하려고 한 자는 10년 이하의 징역 또는 금고’에 처한다고 규정했다.4 일제 사법 당국은 제령 제7호를 시행하기 전 대한제국기에 제정된 ‘보안법’과 ‘출판법’을 적용해 3·1운동 관련자들을 처벌하려 했는데, 이들 법률은 최고 형량이 각각 징역 2년과 징역 3년이었다. 독립운동에 대한 더 강한 처벌을 목적으로 제령 제7호를 급조한 것이다.

3·1운동 당시 조선총독부는 형사 재판을 외형상 3심제로 운영했다. 지방법원(1심)과 복심법원(2심), 최종심과 특별한 사건을 다루는 고등법원으로 사법부를 구성했다. 정식 재판 전에는 예심 절차를 뒀다. 여기서 핵심은 ‘예심 제도’다. 예심 제도는 1912년 ‘조선형사령’에 의해 전면 도입됐다. 애초 일본 법률인 ‘형사소송법’에서 규정한 예심은 검사나 피고인으로부터 독립한 제3자로서 예심 판사가 사건을 정식 재판에 올릴지 미리 심리해 ‘범죄 성립의 확신’이 있는 경우에만 공판을 시작하도록 한 일종의 ‘인권보호제도’였다.

하지만 조선에서 일제 사법 당국은 예심 판사가 예심 단계에서 피의자를 무기한 구속할 수 있는 규정을 악용했다. 피체된 독립운동가들이 예심에서 정식 재판도 받지 못한 채 무기한 붙잡혀 있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조선형사령’에 의해 검사나 사법경찰도 예심 판사에 준하는 강제 수사 처분권을 갖고 있었다.5 악랄했던 경찰서 조사 과정은 물론이거니와 예심 판사마저 독립운동가에게 고문을 가한 사례도 있었다.6

일제의 김세환 선생 감시 카드. 출처/공훈전자사료관
일제의 김세환 선생 감시 카드. 출처/공훈전자사료관

교묘한 사법 탄압의 대표적 사례가 3·1운동 지도자 48명의 사건이다. 이들 가운데는 격렬했던 경기도 수원 지역 만세운동을 기획하고 주도한 김세환(1889~1945) 선생도 포함됐다.

수원 삼일여학교 교사 김세환 선생

만세시위로 옥고, 1년7개월만에 무죄

고문·회유에도 “또 독립운동할건가”

재판중 검사가 묻자 결연히 “그렇다”

수원상업강습소와 삼일여학교(현 매향중학교 전신) 교사였던 김세환은 1919년 2월부터 3·1운동 준비 모임에 참여해 수원과 충남 지역 조직 책임자를 맡았다. 김세환은 2월 말 수원상업강습소에서 수원 만세 운동 최종 준비 회의를 열고, 강습소 2회 졸업생 김노적(1895~1963)을 만세 시위 동원 책임자로 임명했다.

3월1일 수원군 수원면 방화수류정 인근에서 김세환의 지시로 김노적 등 교사와 학생, 천도교와 기독교 등 종교인을 비롯한 수백명이 횃불을 들고 모였다. 이들은 동쪽 창룡문 봉수대부터 서쪽 팔달산 서장대까지 성곽 일대에 봉화를 올렸으며, 이 횃불 시위는 수원 지역 만세운동의 도화선이 됐다. 3~4월 수원군에서만 21차례 만세운동이 이어졌다.

경성만세시위에 참여하고 경성에 머물던 김세환은 3월13일 일본 경찰에 체포됐다. 수일 동안 경찰과 검사의 조사를 받은 김세환은 다른 3·1운동 지도자들과 마찬가지로 내란죄로 경성지방법원 예심에 회부됐는데, 예심이 종결되기까지 5개월이 넘게 걸렸다. 내란죄가 아니라고 결정된 이후 비로소 1심이 진행되기까지 기간은 8개월이었다. 김세환은 1심을 거쳐 1920년 10월30일 2심 판결이 확정되기까지 7개월 남짓 계속해서 감옥 생활을 해야 했다.

악명 높은 서대문형무소(당시 서대문감옥)에서 약 1년7개월 동안 옥고를 치른 후 김세환이 선고받은 판결은 ‘무죄’다. 그러나 이 기간 김세환이 고문, 강요와 회유, 열악한 환경의 옥살이로 받은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김동인(1900~1951)이 남긴 단편 소설 ‘태형’을 통해 김세환 선생이 겪었을 옥고를 조금이나마 헤아릴 수 있을 것 같다. 김동인은 동생의 요청으로 3·1운동 격문을 지어줬다가 미결수로 100일 동안 감옥살이를 했는데, 그때 경험을 다룬 소설이 ‘태형’이다.

“다섯 평이 좀 못 되는 이 방에, 처음에는 스무 사람이 있었지만, 몇 방을 합칠 때에 스물여덟 사람이 되었다. 그때에 이를 어찌하노 하였다. 진남포 감옥에서 공소로 넘어온 사람까지 하여 서른네 사람이 되었을 때에 우리는 한숨을 쉬었다. 그러나 신의주와 해주 감옥에서 넘어온 사람까지 하여 마흔한 사람이 된 때에 우리는 한숨도 못 쉬었다. 혀를 찼다.”7

“다리 진열장이었다. 머리와 몸집은 다 어디 갔는지 방 안에 하나도 안 보이고, 다리만 몇 겹씩 포개이고 포개이고 하여 있다. (중략) 저편 끝에서 다리가 일여덟 개 들썩들썩하더니 그 틈으로 머리 하나 쑥 나오다가 긴 숨을 내어쉬고 도로 다리 속으로 스러진다.”8

김세환 선생 신문조서. 출처/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
김세환 선생 신문조서. 출처/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

이런 악조건 속에서도 김세환은 꿋꿋이 버티며 재판에 임했다. 그는 1919년 8월29일 법정에서 예심 판사 쿠스노키(楠常藏)의 신문에 당당하게 맞서며 3·1운동의 기폭제가 된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1856~1924)의 ‘민족자결주의’ 원칙을 주장했다.

“조선 안에서 선언서를 발표하고, 또 강화회의(1919~1920년 파리 강화회의)에 청원서를 내면 세계의 대세로 강화회의에서 조선의 독립을 승인해 줄 것으로 생각했소. 일본에서도 당연히 그것을 승인해 줄 것으로 생각한 것은 물론이요.”9

일제는 3·1운동 전후로 우리 민중을 마구잡이로 탄압했다. 감옥 수감자는 1910년 7천21명에서 1916년 1만869명으로 1만명을 넘어서더니 1919년 1만5천161명으로 폭증했다. 사법경찰관은 ‘조선태형령’(1912~1920년) 등을 통해 ‘태형’ 같은 즉결 처분도 가능했다. 태형은 일본에서조차 1882년 폐지된 형벌이었다. 야만적인 태형으로 처벌받은 사람도 1912년 4천316명에서 1918년 1만8천19명에 달했다.10

일제강점기 형사사법제도는 기본적으로 민족 해방 운동을 탄압하고, 식민지 조선인들의 일상을 규제하는 목적으로 제정·시행됐다. 1920년대 사회주의를 기반으로 한 항일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자 일제는 1925년 ‘치안유지법’을 제정해 사회주의계열 독립운동가들을 일본보다 더 거센 처벌로 탄압했다. 1942년 소년범에게 적용할 목적으로 제정한 ‘조선소년령’은 2차 세계대전 시기 전쟁에 동원할 인적 자원 관리를 위한 사법적 수단으로 악용했다.11

사법 탄압에도 굴하지 않은 독립운동가들이 있었다. 경인일보는 광복·창간 80주년 특별기획 ‘일제 법정에 맞선 독립운동가’를 통해 이들의 법정 드라마를 본격적으로 펼친다. 일제의 사법 탄압 전반을 소개한 프롤로그는 김세환 선생이 당시 법정에서 보여 준 기개와 결연한 의지로 마무리하려 한다.

재판 중 검사는 물었다. “금후에도 독립운동을 계속할 것인가?” 김세환은 간단명료하게 대답했다. “그렇다.”12

[출처]

1) ‘3·1운동 관련자 예심 청구서’ 각색, 국가기록원, 1919년 8월6일

2) 박찬승,‘한국독립운동사’, 역사비평사, 2014, 94쪽

3) ‘고등법원 특별형사부 결정서’ 각색, 국가기록원, 1920년 3월22일

4) 도면회, ‘근대 사법 제도와 일제강점기 형사 재판’ 국가기록원, 2017, 116~117쪽

5) 도면회, 같은 책 128~131쪽

6) 한인섭, ‘식민지 법정에서 독립을 변론하다’, 경인문화사, 2012, 355쪽

7) 김동인, ‘김동인 단편선 ‘감자’’, 현대문학, 2011, 119쪽

8) 김동인, 같은 책 125쪽

9) ‘김세환 신문조서’ 각색,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 1919년 8월29일

10) 김상균, ‘일제의 식민지 통치를 위한 사법적 통제에 관한 연구’, ‘유관순연구’ 제28권 제1호, 2023

11) 염복규, ‘한국근대사 기초자료집 5 ‘일제강점기의 사법’’, 국사편찬위원회, 2012

12) ‘2020년 3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공훈전자사료관, 2020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