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과도 같은 노무현식 당선에는 몇가지 숨은 원동력과 변수들이 작용했다. 노무현 승리뒤에는 김대중정부의 내치안정과 경제·대북한 정책의 성공, 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 천정배의원 등 개혁세력등의 피와 땀이 숨어있다. 또한 16년전에 의문사한 허원근일병과 신효순, 심미선 두 여중생의 재판도 넘길 수 없다.
 
노무현 후보는 사실상 집권당의 후보였지만 97년 이회창후보와는 달리, 현정권의 국내외 불안요인이 없이 선거를 치를 수 있었다.

국민의 정부는 사실상 선거전이 시작된 11월이후부터 물가안정, 전월세등 주택시장안정, 수출증가, 주식시장 안정, 연 6%대 성장률을 보이면서 집권당후보에겐 치명적인 내치에 의한 불안요인을 없앴다. 김대중 대통령은 남북정상회담과 대북포용정책에 의해 이산가족왕래와 경제교류를 활성화해 북한의 실상을 개방시키는데 성공, 남북관계에 있어 전쟁의 불안감으로 부터 벗어나게 했다. 북한은 미국에 대해서는 핵처리시설을 개봉하겠다고 대치하면서도 남한에 대해서는 개성공단특구지정, 금강산 육로 협상, 이산가족상봉을 위한 적십자사 협상 등을 계속해 불안요인을 제거했다.

또한 벤처 활성화 등 지식강국 정책을 지향, 인터넷강국이 됨으로써 신문방송 등과는 또다른 막강한 지식정보교류 마당을 창출했다. 오마이뉴스, e윈컴 등 인터넷상의 언론들은 노무현 당선자의 홍보는 물론, 각종 선거관련 정보들을 거의 실시간대로 네티즌들에게 공급했다. 18일 밤 10시30분 정몽준대표의 공조파기 선언에 네티즌들의 들끓는 비난전은 상당수의 30~40대 주부들의 표심을 노무현쪽으로 유도해냈다.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 뒤에는 '노무현을 사랑하는 모임'과 '천정배의원등 민주당내 소장파 개혁세력들'의 피와 땀이 결정체로 영글어 있다. 2000년 4·13총선에서 낙선된뒤 '바보 노무현'을 위해 탄생한 노사모는 3월 국민경선, 12월 대선의 밑거름이 됐다. 천정배의원등 당내 개혁소장파의원들은 노무현의 지지도가 15%까지 추락하고 동교동계에 의해 쉼없이 흔들리던 노무현을 지켜낸 호위 무사들 이었다.

선거전에서 보여진 홍보전략도 탁월했다는 평가다. 노무현의 눈물, 자갈치아지매 등 유권자들의 정서를 파고드는 포지티브전은 한나라당의 네거티브전을 제압했다는 평가다.

숨은 요인도 있다. 미군 장갑차에 의해 숨진 효순양과 미선 두여중생과 1984년 4월 허원근 일병의 죽음이다. 두 여중생의 '잘못된 재판'은 국민적인 반미감정을 불러일으켜 촛불시위로 번졌다. 전세계 80여개국에 군을 주둔하고 있는 미국에 한미주둔둔지위협정(SOFA)의 재개정을 요구하고 부시대통령의 사과를 받아내는 등 막강한 영향력을 최소화해냈다

1984년 군복무중 사망한 허원근일병의 죽음도 보이지 않는 변수로 작용했다. 국가인권위와 국방부의 조사가 엇갈린 허일병의 죽음은 자살이든 타살이든 군복부중인 사병과 가족들의 표심에 영향을 미쳤다. 이회창 후보의 두아들의 병역문제가 사그러들지 않고 군 부재자투표에서 노무현 몰표가 나오는 결과를 낳았다. 갖은 우여곡절 끝에 이뤄진 1.5%의 승리를 곱씹어보면 예정된 교훈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