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0년 인천. 한·중·일 삼국의 상인들은 인천을 무대로 '무역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오사카-인천-상하이를 연결하는 상품유통구조 속에서 어떤 상품을 어디에서 사들이고, 어디에 어떻게 팔아야 이익이 크게 날 것인 지, 국제 환율은 어떻게 변하는 지, 어떤 방식으로 결제해야 하는 지, 상대방의 신용상태는 어떤 지 등 따져봐야 할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이런 치열함 속에서도 우리나라 상인들이 전체 시장의 60% 정도를 점유하고 있었다. 나머지 40%를 중국과 일본 상인들이 나눠 가졌다.

인천은 100여년 전에도 동북아시아의 물류중심지였던 것이다.

개항시기 인천은 한·중·일 삼국 상인의 각축장이었고 국내외 유통네트워크의 중심지 역할을 하면서 우리나라 근대 경제시스템의 체질화에 크게 기여했다는 연구결과가 나와 주목된다.

김윤희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선임연구원은 22일 인천시 남동구 구월동 한미은행 10층 인천학연구원에서 열린 '제19회 인천학세미나'에서 '개항기 인천유통네트워크와 한상(韓商)의 성장 조건'이란 제목의 주제발표를 통해 이같은 주장을 폈다.

김 연구원은 “1894년 이후 인천은 두개의 상품유통망을 연결하는 지위를 갖고 있었는데 그 하나는 나가사키, 오사카 등의 일본지역과 상하이, 지푸 등의 중국지역과의 해외상품 유통망이었고 다른 하나는 평양, 군산, 목포 등의 서해안 유통망이었다”면서 “인천은 해외무역과 국내무역의 중심지였다”고 강조했다.

발제자료에 따르면 당시 인천은 상하이-오사카 무역의 확대라는 상황을 배경으로 청·일 상인의 자금회전을 매개하는 기능도 갖게 됐다.

항만에 국제공항까지 갖추고 경제자유구역으로 지정된 지금의 인천이 지향점으로 삼는 '동북아시아 물류중심지'가 역사적으로도 실현됐던 셈이다.

1890년 인천~상하이 직항로가 개설되면서는 수입상품이 크게 다양해졌다. 미곡이나 잡곡류는 물론, 담배, 석탄, 성냥, 석유, 양지(가옥의 바닥재), 비누, 모제품, 견직물류 등 다양했다.

인천에선 신용거래도 확대됐다. 급격한 환율변동으로 일어나는 불안정한 시장상황에 공동으로 대응하기 위한 삼국 상인간 일종의 합의였다. 신용거래가 늘면서는 자본의 쏠림현상도 나타났다고 한다. 신용시스템의 발전은 자본가의 분화를 촉진하면서 대자본가에겐 더 많은 이윤을 가져다주었지만, 소자본가에겐 성장의 기회를 박탈했다는 것이다.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서울을 등지고 있는 인천은 한상에게 성장의 기반이었다는 점이다. 인천~서울간 무역에서 한국산 물품의 취급은 대부분 한상이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 서울지역 등 현지 사정과 거래상인의 신용을 쉽게 파악할 수 있었던 점도 한상이 청상과 일상에 비해 유리한 지위를 차지하는 요인이 됐다.

격동기 인천을 통해 자본력을 키우던 한상들도 1905년 이후 일본의 정치·경제·군사적 침탈행위가 노골화하면서 기세가 꺾이고 만다.

한편 토론자로 나선 이갑영 인천대 교수는 “인천은 요즘 동북아물류중심도시를 지향하는데, 개항기 인천-상하이-오사카라는 국제유통네트워크를 보면 인천은 운명적으로 동북아의 중심도시가 될 수 있다는 기대가 커진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