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항 이후 최초의 인천 통사로 평가할 만한 '인천 번창기'는 1900년 대 인천의 모습을 한 눈에 볼 수 있다. 쓰여진 뒤 100년이 넘어 햇빛을 보게 된 이 책은 그동안 우리에게 알려진 개항기 인천지역사와는 차원이 다르다. 이 책보다 5년 먼저 나온 '仁川事情'(1898)은 자료적 가치가 높기는 하지만 제목에서 보이는 것처럼 당시 인천의 실정을 간략하게 소개한 60쪽 정도되는 안내서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또 철저하게 작자 아오야마 요시미의 주관이 너무 크게 반영됐다는 한계도 넘지 못하고 있다.

 '인천번창기'는 크게 ▲금석(今昔)의 인천 ▲인천의 무역 ▲인천의 해육운(海陸運) ▲인천의 행정 ▲인천의 교육 ▲인천의 종교 ▲인천의 사회 ▲인천의 잡조(각종 조합·명소 등) ▲회구쇄담(인천거주 일본인들의 회상) 등으로 짜여져 있다. 또 '인천관민 인명록'이라는 부록은 당시 중요인물들을 자세히 서술하고 있다.

 작가는 이 책을 쓰기 20년 전인 1883년에 인천에 왔다. “…수도 경성의 관문으로, 경기, 충청, 황해, 평안 등 4도 화물의 집산지로서 유명한 인천항이다. 닻을 월미도 밖에 내리고, 흰옷의 한인이 마중하는 배에 몸을 맡겨 상륙하면, 부두 왼편에 경인철도 정거장이 바로 보이고, 위를 보면 낭떠러지 위에 영국영사관은 인천시가를 흘겨보며 서 있다…”란 내용은 개항 당시의 인천의 모습을 생생히 보여준다.

 특히 1883년 5월 개항과 함께 인천에 온 일본인은 100여 명에 달했으나, 이들은 새로 개항한 인천이 돈벌이가 유망하다는 소문을 듣고 야마구치, 나가사키 주변에서 한밑천 챙기려는 무리였다고 작가는 보고 있다.
 일본은 조선에 동, 주석, 아연 등을 수출해 재미를 봤고, 이들 물건을 해안에 그냥 내려 놓은 뒤 묶어 놓지도 않았지만 없어진 적이 없었다고 한다. 조선이 일본에서 동, 주석, 아연 등을 수입한 것은 당시 당오전 주조가 활발했기 때문으로 작가는 분석하고 있다.

 일본거류지는 그해 6월 30일에 설정됐으며, 이 때는 38가구에 인구는 120여 명이었다고 한다. 인천거주 일본인은 불과 1년 여 만인 1884년 5월께는 인구가 500여 명으로 급증했다.

 주목할 만한 것은 개항 이후 1889년 까지 미곡조차도 일본에서 수입해 오다 1890년에 이르러서야 처음으로 쌀을 일본에 수출했다고 한다. 이는 1889년에 일본에 큰 흉년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어찌됐든 조선쌀의 첫 일본 수출은 이렇게 이루어진 것이다.

 개항 10년 뒤인 1893년 인천의 각국 거류지에 거주하는 일본인(일본 거류지 제외)은 1천447명었고, 이들은 각국 거류지 외국인에게 1천596원의 지대와 5천454원의 임대료를 물었다고 한다. 작가는 이를 두고 '오늘날 각국 거류지에 소수의 외국인이 다수의 일본인을 지대와 임대료로 괴롭혔다'고 통탄하고 있을 정도다.

 이 밖에 인천 사회를 ▲신사(紳士)사회 ▲용인(傭人)사회 ▲노동사회 ▲화류사회 등으로 분류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