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선조들은 이미 4백년 전에 정보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다. 일종의 신문인 `조보(朝報)'를 만들어 정보 전달 매체로 삼은 것이다.

조보는 `조정 소식'이란 뜻으로 오늘날 정부의 `관보' 격이다. `기별(奇別)' `저보(邸報)'라고도 했던 관보가 언제부터 발행되었는지는 정확치 않으나 기록에 남아 있는 것은 조선조 중종 때부터다.

매일 오전에 발행된 조보는 지금의 대통령 비서실에 해당하는 승정원에서 만들었다. 승정원은 선별한 기사를 `조보소'라는 곳에서 발표했다.

여러 관청에서 나온 직원들은 그것을 베껴서 산하 기관과 개인 독자에게 보냈다. 구독료는 고위 관리가 1개월에 4냥, 하급관리는 1냥 5전이었다.

조보에 실린 기사는 왕의 지시사항·관리들의 인사와 동정 등이고, 급한 것은 호외와 같은 '분발(分撥)'을 발행했다.

또한 관리 인사 소식만을 알리는 `정사(政事)'와 왕에게 올리는 건의·진정서의 내용을 실은 `소차(疏箚)' 등이 별도로 발행된 걸 보면 당시 양반 관료층의 왕성한 정보 욕구를 짐작할만 하다.

독자는 한문을 아는 수백명 정도의 지식인이었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정보를 차단했었다. 나라 밖으로 정보가 나가는 걸 우려했던 모양이다. 선조 10년의 일이다.

서울 사람 30여명이 조보를 활판인쇄해서 일반인들에게 팔다가 의금부에 잡혀가 혼쭐난 다음 귀양을 갔다.

신문학을 하는 학자들은 그때에 인쇄된 것이 세계 최초의 일간신문일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서양의 최초 활판인쇄 일간신문이 1650년 독일의 `Einkommende Zeitung'이고, 중국에서는 1638년 명나라 때 처음 나온 것을 볼 때 70∼80년 앞선 것이라는 의견이다.

그들은 귀양을 가긴 했지만 세계적 기록을 세운 셈이다. 1894년 갑오개혁 때 폐간된 조보는 오늘날의 신문과 같지는 않으나 훌륭한 원형이었다.

근대 신문인 `한성순보'와 `한성주보'도 소식원은 바로 조보였다.

글로벌스타 프로젝트에도 참여하기에 이른 우리의 저력은 선조들의 정보욕구를 본받은 것이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성싶다.

辛 世 默〈주필〉